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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4.11.23) 오대일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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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희스콜라스티카 작성일15-02-10 23:26 조회16,70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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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 대축일

 

오늘은 전례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주일이며, 다음 주일부터는 새로운 전례력인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교회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며, 오늘의 복음 말씀은 최후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고, 최후심판에 관한 말씀을 복음으로 정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진정한 우리의 왕이시며 모든 주권이 그분께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왕으로 고백하는 예수님께서는 더럽고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사람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그런 분을 왕으로 고백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일생 동안 보여주신 사랑의 봉사 때문입니다.

즉 지난 주 평신도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왕이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자세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5-28)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하여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부여받았는데, 여기서 왕직은 바로 봉사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세상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들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이 속한 마태오 복음 25장은 세 가지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즉,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비유부터 시작해서 지난 주일에 들었던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오늘 복음인 최후심판의 비유입니다.

 

이 중에서 달란트의 비유는 루가 복음에도 나오지만, 다른 두 가지 말씀은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말씀은 모두 미래의 심판에 대비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비유에서는 언제 올지 모르는 심판에 대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각자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해서 좋은 결실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최후심판의 비유에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후심판의 기준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최후심판의 기준이 하느님을 철저히 믿으며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있지 않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기준에 따르면 과연 내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쉬워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사랑이란 것이 너무나 이해타산적이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는 쉬워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너는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 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잘사는 이웃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러면 너도 그들의 초대를 받아서 네가 베풀어 준 것을 도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루가 14,12-14)

 

또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해서 정작 그 사람에게 피해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만 불편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 멀리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보이면 내가 가던 길을 멀리 돌아서 갑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이 피해를 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내가 피해를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고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4-5)

따라서 사랑에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을 차별해서 사랑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합시다.

 

끝으로 오늘 복음말씀은 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들은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서품성구를 정하는데,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서품성구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서품성구를 정할 때, 처음에는 부담이 되는 말씀보다 힘이 되는 말씀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며 아직도 나 자신에 얽매여 있는 것을 깨닫고 가장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정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서품성구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도 이 말씀대로 살아갈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앞으로 사제의 길을 걸어가면서 회의에 빠지거나 현실에 안주하려고 할 때 저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서품성구로 정했습니다.

 

특히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들도 앞으로 신앙생활의 지표가 될 수 있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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