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미사(12.31)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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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1-01-01 09:29 조회8,251회본문
* 송년 미사
“늙은 소나무처럼”
옛날 저희 집에는 낡은 전축이 하나 있었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LP판 중에 마리아 칼라스의 아베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슈베르트, 구노 등의 아베마리아를 듣고 계시면 저는 곧잘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웠고, 어머니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해주곤 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해주셨던 얘기 중 하나가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열 살도 안 된 어린 저에게 인생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인생은 무덤으로 가는 행진이라고... 어머니는 지금 반쯤 왔고 저는 이제 막 그 행진을 시작한 것이라고... 그때 어머니는 한창 젊으실 때였습니다.
세월은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고, 인생도 다시 잘 해볼 수 있는 연극이 아닙니다. 지구가 돌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니까, 마치 같은 시간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실상 우리는 죽음이라는 종착점이 보이는 일직선상(一直線上)의 길을 달리며 유일한 오늘을 살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 안에 정말로 신비한 생명체이며, 참으로 소중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또 한해를 마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중한 시간들이 기쁨과 행복과 감사로 기억되기보다는, 아픔과 미련과 부끄러움들만 스쳐갑니다. 코로나라는 고통 중에서도 나만을 생각하고 보호받고 싶어했던 모습, 더 힘든 사람들의 어려움과 슬픔에 무감각했고, 다른 이들의 행운에는 더더욱 함께하지 못했던 옹졸한 마음, 억겁(億劫)의 연(緣)이 만들어준 귀한 만남들을 꽃피우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았던 각박한 시간. 지금, 이 시간, 비록 힘든 시간이었을지라도 알토란같은 일 년의 시간을 주셨던 하느님께 봉헌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토란을 먹고도 부끄러운 속 빈 강정이 되어버린 우리는 염치없이 또다시 한 해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용서해주소서, 축복해주소서.
올 한해는 특별히 인류역사상 유래 없는 코로나라는 사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죽어갔습니다. 지금도 통곡하고 있을 그들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하느님 성전에 모여와, 어제도 돌아보고 내일도 희망하는 우리는 결코 그들보다 잘 살아서 이런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다행스럽게 행운을 차지하여 그들에게는 불행이 돌아갔고, 그들의 불행을 대가로 우리가 지금 미안한 건강, 미안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또다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해의 시간과 일상들을 두렵고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할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과 잘 타협하고, 감성이 무뎌지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늙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우리는 늙지 맙시다. 육체는 늙어도 영혼은 늙지 맙시다.
'겸손해질수록, 사랑할수록' 더 젊어지고 싱싱해지는 것이 영혼입니다. 늙은 소나무가 더 멋있지 않습니까? 또다시 다시 못 올 한 해가 갔습니다. 이제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