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나해 주님 승천 대축일(05.16) 신성길 니콜라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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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1-05-16 15:07 조회6,537회본문
주님 승천 대축일
우리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과 비교되는 특징들 중의 하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늘 우리 인간들 곁에 머물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종교들에서는 전능하신 신, 영원한 진리가 인간 세계가 아닌 저 하늘 너머, 우주 어딘가에 계셔서 인간들이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한 초월적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범접 불가능한 세계에 머물러 계셔야 하는 존재로 생각됩니다. 일본의 신도처럼 수많은 잡신들이 인간 세계에 같이 살고 있는 것은 좀 색다른 예외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는 성부, 성자, 성령인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늘 함께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고, 성자이신 예수님은 이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 함께 계셨고, 성령이신 하느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은 예수님 승천을 기억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지상 과제를 모두 마치시고 하늘 나라로 올라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며,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을 설명해 주시고, 함께 식사를 나누시던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지상에 머물지 않으시고 하느님 품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우리는 삶의 궁극적 목적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인간들의 바램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부활을 매듭짓고 완성하는 것을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떠나시며 잠시 예수님의 부재로 슬퍼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렇게 우리 인간과 영원히 함께 할 신의 존재,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 하느님이신 성령이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이어집니다.
그렇게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종종 하느님의 부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의 위기는 우리가 신의 부재를 더 광범위하고, 더 강하고, 더 길게 느끼게 되는 사건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의 2년여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일일이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우리 개개인들이 겪는 우울함, 무기력, 어두움, 분노 등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더 강한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쉽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우리 인간사회에 일어나는가?” 사실 하도 답답해서 하느님께 따지는 질문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결국 신의 존재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서 나오는 한탄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해서 던지는 질문이라기보다 “신과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라는 느낌이 강할 때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어떻게든 뭐라도 좀 해 주세요”라는 호소요 외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통하여 인류가 겪었던 많은 위기 앞에서 성숙한 신앙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대신 “이 일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600만이 죽어간 유태인 학살의 현장에서 유태인 랍비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조들의 고난을 기억하며 학살의 현장에 있던 동족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지 말고 “이 일에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고 독려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들도 우리랑 같은 심정으로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하느님의 대답은 침묵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침묵을 이렇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은 신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질문으로 우리를 더 나약하게 할 뿐입니다. 대신 “이 일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끊어진 신과의 연결고리를 다시 이어나가 우리를 더 강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회복한 유태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여 인종학살이라는 참화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가 지금 화이자 제약회사의 회장인 알버트 불라입니다. 그의 부모와 형제는 유태인 홀로코스트에서 모두 학살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비참한 비극 속에 머물러 삶을 자포자기하고 신을 부정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인류를 구원할 화이자의 백신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신의 부재를 느끼는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질문을 자주 던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줄 것이며, 우리 공동체가 함께 고민할 때 믿음은 더 강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신이 부재한다는 강한 느낌 속에서도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승천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머무르시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