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09.19) 신성길 니콜라오 신부님 > 강론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강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09.19) 신성길 니콜라오 신부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1-09-19 11:34 조회5,879회

본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축제를 지냅니다. 한국의 순교 성인 성녀 중에 특별히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순교자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아 여러가지 경축 행사를 통해 성인의 삶을 기리고 있습니다. 저도 오늘 강론을 성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기억하는 데 할애하고자 합니다.

 

성 김대건 신부님은 1821821일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에 있는 솔뫼 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은 증조부 김진후 비오, 종조부 김한현 안드레아,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까지 4대가 모두 순교한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7살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에 있는 골배 마실로 피신하였고, 거기에서 183615살 나이에 파리 외방전교회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123일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조선을 떠나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이 세 명의 신학생은 18376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6개월에 이르는 어린 신학생들의 장도가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의 여정은 계속해서 순탄치 않았는데 1836년에서 39년 사이 두 번이나 마카오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 롤롬보이로 피난을 가야했고, 그 와중에 최방제 신학생은 병사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조선에서 유일하게 다수의 서양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김대건은 1842829일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맺은 난징조약에 참관했던 프랑스 함대의 세실 함장의 요청으로 난징 조약에 통역으로 참관하게 됩니다. 그 만큼 당시 조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재이기도 하였습니다.

 

김대건 신학생은 당시 파리 외방 선교회 신부들의 입국 준비를 위해 중국에 머물던 중, 184412월 중국 장춘의 소팔가자 성당에서 부제서품을 받고, 1845817일 중국 상해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조선교회가 창립된 이후 61년 만에 조선 교회에는 최초의 사제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 기쁨도 잠시 시련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65일 프랑스 신부님들의 입국을 준비하다 백령도 부근에서 체포되고 맙니다. 사제로서 활동한 지 채 1년도 되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916일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합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는 1026일 이민식 빈첸시오에 의해 경기도 용인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2575일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5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6월 체포되어 9월에 돌아가시기까지 3개월 동안 스무 통이 넘는 편지글을 남겼습니다. 그 편지들 안에는 조선인 최초의 사제로서, 순교자 집안의 후예로서, 시대가 허락하지 않던 조선의 유능한 젊은이로서, 그리고 하느님을 목숨 바쳐 사랑했던 신앙인으로서의 소회가 구구절절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되새겨 보고 싶은 몇몇 구절이 있습니다.

 

- 관장이 제게 묻기를, ”네가 천주교인이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였다.

- 나는 천주교가 참된 종교이므로 받듭니다. 천주교는 내게 천주 공경하기를 가르치고, 또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내게 배교하라는 것은 쓸데없는 말입니다.

-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결코 나는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 이후 천당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 나의 영원한 생명은 이제 시작합니다.

 

잠시나마 이렇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일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일생을 보며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가 왜 이처럼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을까?” 그분의 삶은 절박함과 긴장, 간절함과 고난, 치열함과 사투가 늘 공존했던 삶입니다. 조상 대대로 순교를 당했고, 어린 나이에 장도에 올랐으며, 사제가 된 후 찾은 조국은 이 젊은이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그런 고난의 연속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성인됨은 그렇게 빛을 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성 김대건은 정식으로 서양 학문을 배운 최초의 조선인이었으며, 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를 알았던 당대의 유일한 청년이었습니다. 말 타고 걸어서 한양 가던 그 시절에, 전 세계의 삼분의 일을 여행했으며, 태풍의 풍랑 속에 황해 바다를 나침반 하나로 건너면서 돛과 노와 기도에 의지한 채 조선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해 냈습니다. 중화사상에 젖어 세상을 볼 줄 몰랐던 그 시대, 우주와 세상의 크기를 알았고, 태초의 원인을 깨달았고,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영원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미리 알았던 선각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한국 순교 성인들을 존경합니다. 그들의 불굴의 의지, 간절한 신앙, 절박한 하느님에의 갈망은 단지 신앙인으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합니다. 우리는 그 분들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그 분들이 피로써 지켜낸 것들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랑스럽게, 용기 있게, 지치지 말고 현세를 살아갑시다. 신앙을 지키고, 삶의 어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사랑 실천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순교 성인들의 후예들이 살아갈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멘.

 


접속자집계

오늘
2,052
어제
2,037
최대
3,012
전체
1,931,676

Copyright © www.tokyo-koreancatholic.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