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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다해 주님 만찬 성목요일(04.14)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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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2-04-15 09:39 조회4,6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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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만찬 성목요일

 

 

발 씻는 용서

 

큰 병에 걸려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제 일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고, 자기를 위하는 것도 필요 없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을 한 번 더 만나려고,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더 하려고 몸부림칩니다. 911 테러 때 빌딩 안에 갇혀있던 사람들도, 살아서 몇 분 남지 않은 시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핸드폰으로 남긴 마지막 말이 모두 사랑한다는 말이었답니다.

 

우리는 힘든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죽는 연습을 하는 시기입니다. 죽는 연습이란 바로 사랑하는 연습을 말합니다. 죽는 사람에게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당신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당신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죽는 연습을, 사랑하는 연습을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행하신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남은 것은 오직 사랑뿐, 간절한 사랑뿐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사랑으로 나아갈 때 꼭 걸려 넘어지는 것이 바로 용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그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용서를 통한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3년 동안 동고동락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였지만, 너무 가까워서, 너무 잘 알아서 서로 상처도 입었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상처를 많이 입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뜻으로 발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못살게 굴고, 그분께 상처도 드렸지만, 제자들이 잘못을 빌기 전에 먼저 그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그 마지막 추억의 발 씻김은, ‘빨갱이다, 친일파다, 죽일 놈이다, 틀린 놈이다, 미운 놈이다, 모두 그 놈 때문이다이렇게 미움과 원한과 오해의 사슬에 묶여있는 우리들에게, 그 모든 것을 벗어 던질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는 발 씻김입니다. 나를 괴롭히고, 나를 팔아먹을 사람까지도 먼저 끌어 안아주는 용서의 예식입니다. 내 손발에 못질하는 사람들의 손을 내 피로 씻어주는 세례예식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부분만, 잘한 부분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추한 부분, 죄스러운 부분을 용서하고 포용할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바로 그 용서를 담고 있는 사랑의 진수(眞髓)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꼭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을 위험에 처하면 어느새 용서를 넘어 사랑만 남습니다. 그런데 살날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늘 용서와 줄다리기를 합니다. ‘용서할까? 아니, 용서못해. 왜 내가 먼저 용서를 해?’

 

그러나 교우 여러분, 사랑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 용서하지 못해 마음고생 할 시간이 없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마땅하겠지만 내가 먼저 무릎 꿇고, 그가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겠지만 그의 발을 잡아당겨 씻어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먼저 용서를 해야만 가능한 것이고, 용서는 먼저 자기를 죽여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들을 때마다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하늘 같은 스승이 자기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제자들의 충격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충격적인 추억이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훗날 피비린내 나는 로마의 박해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나를 찌르고 죽이는 원수들의 죄악을 내 피로 씻어주는 용서의 힘을, 사랑의 힘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힘을 남겨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당신이 죽기 전에 꼭 그것을 남겨주고 싶으셔서 오늘 이렇게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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