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다해 연중 제24주일(09.11)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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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옥란빅토리아 작성일22-09-11 13:33 조회4,004회본문
* 연중 제 24주일 다해
“용서받기”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쉽게 사람들을 잃어버립니다. 이해관계 때문에 대립 되었을 때, 새로움을 못 찾을 때,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주소록에서 그 사람들의 이름을 지웁니다. 우리의 이름도 그들의 주소록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참 서글픈 일입니다. 어떤 만남인데, 어떤 인연인데, 한때는 참으로 소중했는데.
실패, 죄, 소외, 허무, 이런 것들은 얼핏 듣기에 좋지 않은 일들이고, 피하고 싶은 것들이지만, 사실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을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경제와 물질중심의 가치관이 우리를 '성공 제일주의'의 삶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흔아홉의 성공한 그룹에 속하여 무난한 인생을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사회의 기준에서 ‘실패한 하나’는 제거되거나 잊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실패한 하나’를 무척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아흔아홉의 성공한 그룹은, 일에 있어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익명화되고 비인간화되어 가고, 실패한 하나는 자신의 상처 입은 인격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이 사회처럼 성공위주로, 성과위주로 ‘일’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한 사람의 죄인도, 실패한 하나도 보듬어 안아주는 ‘사람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것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나든 못 나든 자식은 다 소중하다는 이 말처럼, 하느님 앞에 우리는 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예수님이 보잘것없는 이 하나를 찾아 나서신 이유는, 그 보잘것없는 이를 사랑하셨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보잘것없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도 언젠가는 그 보잘것없는 이가 되는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마음이 점점 무디어져 가는 요즘 세상에 고해성사를 보고자 고해소에 들어오는 발소리만 들어도 저는 연민의 정이 일어납니다. 사실 인간의 죄라는 것이 모두, 나약함 때문에, 환경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누가 죄를 즐기며 살겠습니까?
완전하고 선하신 하느님 앞에 나약한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문제는 죄를 지은 뒤 '회개하느냐, 회개하지 않느냐' 입니다. 오늘 복음의 아흔아홉은 사실 의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남의 죄만 단죄하는 완고한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용서받는 죄인입니다. 여러분은 용서받지 않는 완고한 죄인입니까? 아니면 용서받는 사랑스러운 죄인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사랑하신답니다. 그러니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 즐겨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여 용서받는 생활을 합시다.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 사랑은 더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