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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사순 제2주일(2015.3.1) 오 대일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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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희스콜라스티카 작성일15-03-10 22:24 조회15,89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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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사순 제2주일

 

어느덧 또 한 달이 지나고 새로운 달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제는 너무나 시간이 빠르게 지나는 것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빠르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주어진 오늘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며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해져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세상의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마침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먼저 제1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철저한 인물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일흔 다섯 살의 나이에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기 12,1)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무작정 길을 떠났습니다.

 

일흔 다섯 살의 나이라면 그동안 평생을 일군 삶의 터전에서 정착하며 편안하게 여생을 누려야 할 나이인데, 하느님의 말씀만을 믿고 무작정 길을 떠난 것입니다.

여기서 “떠남”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나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조금씩 떠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더 큰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즉,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아브라함이 백 살의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기에, 아마도 이사악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찍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니,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믿고 따라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밤새 고민했을 것이고, 아내 사라와도 상의했을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데리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곳을 향해 길을 떠나, 사흘 만에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길을 가면서도 수없이 다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데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죽이려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사악의 자세입니다.

즉, 이사악은 자신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칼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악이 장작을 지고 올라갈 정도라면 충분히 아버지에게 저항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이런 이사악의 모습은 마치 하느님의 뜻대로 묵묵히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결국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사악의 순종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어, 하느님은 이사악 대신에 번제물로 바쳐질 숫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이레”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22,14) “야훼 이레”는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따라서 비록 지금 당장은 너무나 어렵고 힘들어서 때로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고 하느님의 뜻을 도저히 알 수 없을 때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심으로써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시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등 구약의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기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즉,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시킬 분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 모두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두 사람과 같은 운명, 즉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운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에 반해서 엉뚱한 소리만 합니다.

즉 베드로는 거룩한 모습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머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외모지상주의와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영광 속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 인간을 위해서 기꺼이 낮아지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해서 산에서 내려가십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즉,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산에서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산에 머물러 있을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대로 산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그러한 영광은 일장춘몽처럼 금방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영광스런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수고의 보람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귀한 것일수록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은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처럼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느님만을 믿으며 내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삶이며, 그렇게 했을 때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엄청난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데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주일미사에 나오는 것도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헌금이나 교무금도 아깝다고 생각하거나 그저 습관적으로 봉헌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액수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봉헌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도 없는 산위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 산에서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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