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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사순 제1주일(2015.2.22) 오대일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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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희스콜라스티카 작성일15-03-09 19:07 조회16,0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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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사순 제1주일

 

 

오늘 복음에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광야란 마실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삭막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왜 하필 이런 곳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을까요?

광야는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곳이기에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고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타락하여 하느님을 만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선 하느님과 나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데,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광야는 어디일까요?

 

 

예수회 송봉모 신부님께서 쓰신 “광야에 선 인간”이란 책에 보면, 광야는 인간이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며, 생의 우선순위를 보게 하는 자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결여된 고통스런 광야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광야는 두 얼굴을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즉 광야는 한편에서는 고통과 아픔의 얼굴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에서는 하느님의 돌보심의 얼굴을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광야에서 고통의 얼굴만을 바라보면 하느님께 반항하게 되지만, 돌보심의 얼굴을 바라보면 인내와 힘을 얻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광야에서 고통의 얼굴만을 바라보면 유혹을 받게 되어 끝내 파멸하게 되지만, 하느님의 돌보심의 얼굴을 바라보면 시험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람으로 단련되고 정화됩니다.

따라서 광야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련을 겪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광야의 시련 앞에서 구약의 유딧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시험하셨듯이 지금 우리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충성심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불과 같은 시련을 주신 것만큼 혹독하게 우리를 다루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을 깨우쳐주시기 위하여 채찍으로 가르쳐주실 뿐입니다.”(유딧기 8,25-27)

 

 

한편, 광야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인 동시에 유혹을 당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유혹은 대부분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달콤해서 우리가 쉽게 유혹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서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 8,5-6)

 

 

결국 사순시기는 우리의 영혼을 거스르는 육체적인 욕망과의 싸움을 벌이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 본기도에서 거룩한 재계로 악의 세계와 맞서 싸우려 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악의 세계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거룩한 재계로 무장을 해야 하는데, 거룩한 재계는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신 후에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하느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말하며, 그러한 하느님의 나라에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나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또한 복음은 한마디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정말 나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서는 복음이 절대로 기쁜 소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교황님께서는 사순절을 맞이하여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야고 5,8)라는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하셨는데, 이 담화문에서 특별히 무관심의 세계화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가 멀어질 때 우리를 애써 찾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지내고 편안할 때, 잘 지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무관심 속에 빠집니다.

이웃과 하느님께 대한 무관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이웃과 하느님께 대해 무관심해지지 않고 쇄신하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성경 구절을 묵상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1.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 하느님의 사랑은 교회의 가르침과 그 증언을 통하여 무관심이라는 사슬을 끊어버립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에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성사들을 받을 때, 특히 영성체를 할 때에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체이기에 무관심이 몸 안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2.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

이 말씀은 우리 본당과 공동체의 생활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상 교회와 함께 기도하며, 기도할 때 사랑으로 무관심을 이긴 공동체가 됩니다. 천상 교회의 성인들은 늘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합니다.

데레사 성녀는 이 지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고통 받고 신음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승리에 대한 천상 기쁨은 완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신을 벗어나 가난한 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 함께 하라는 부르심을 받아 파견되었습니다.

침묵하지 않는 사랑을 모든 이에게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 본당과 공동체가 무관심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자비의 섬이 되어야 합니다.

 

 

3.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야고 5,8)

우리는 무관심의 유혹을 받고 있어서, 우리가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이 두려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특별히 3월 13일과 14일에 ‘주님을 위한 24시간’ 기도를 바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자선 행위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가 한 인류 가족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때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고통은 회개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겸손되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 우리가 하느님과 형제자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혼자 힘으로 세상과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사악한 유혹에 맞서 싸울 수 있게 해줍니다.

 

 

무관심과 혼자 힘으로 충분하다는 우리의 자만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열려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 마음은 우리를 형제자매에게 다가가도록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시며, 가난한 마음으로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거저 내어주도록 해줍니다.

 

사순 시기를 맞이하여 “저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굳세고 자비로운 마음, 세심하고 너그러운 마음,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무관심의 세계화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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