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6주일(2015.2.15) 오대일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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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희스콜라스티카 작성일15-03-06 22:58 조회16,746회본문
나해 연중 제6주일
영화 “포레스트 검프”와 “말아톤”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어머니의 정성어린 사랑과 관심으로 말미암아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어머니의 지지와 응원이 없었다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어머니와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나병을 하느님께 대한 죄의 벌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병환자와의 접촉은 불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들은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병 환자와 접촉을 했다면, 그는 자신을 다시 정화하는 예식을 행할 때까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병환자와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관습을 깨뜨리고 나병환자를 만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손을 대시어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이나 관습에 얽매이기보다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한편, 오늘날 육체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보다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비록 육체는 건강하고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사실 그 마음과 정신이 썩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혼의 병을 깨닫지 못해서 영혼의 상태는 더욱 나빠져만 가고 결국엔 영혼의 불치병으로 세상을 마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몸이 나병으로 망신창이가 되어 깊은 절망에 빠졌으나 최후의 용기를 내어 온갖 법적인 장벽과 모든 인간적인 규정을 어기고 동네로 들어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의 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가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신적으로 나병에 걸린 사람들도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을 꿇고 “저를 깨끗이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가 치유받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려고 오셨는데, 왜 나병환자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질적인 복만을 바라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도저히 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자신의 병이 치유되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뻤고, 그래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온 동네에 예수님의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체험이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저히 안되겠다고 단념했는데 기적같이 반전된 사건은 없었습니까?
만약 있었다면 단순히 운이 좋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비록 우리가 기적인줄도 모르고 살았지만 기적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또한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에게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영혼과 정신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 뒤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히 예수님과의 만남을 평생 간직했을 것입니다.
기적은 기억하고 있어야 은총이 되며, 기억하는 순간마다 힘이 됩니다.
지난날의 감정과 느낌을 찾아낼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현존과 애정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기적은 한 순간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를 이끌어 가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비록 육체적인 나병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나병처럼 우리의 영혼을 문드러지게 하는 잘못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망각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매일 새롭게 태어남을 잊어버리는 잘못입니다.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항상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편, 지난 2월 11일은 교회가 정한 세계 병자의 날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올해 제23차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나는 눈먼 이에게 눈이 되고 다리 저는 이에게 다리가 되어주었지.”(욥 29,15)를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하셨는데, 교황님께서는 이 담화문에서 특별히 마음의 지혜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마음의 지혜는 형제자매의 고통에 열려 있고,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시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첫째, 마음의 지혜는 형제자매를 섬기는 것입니다.
욥기는 권위가 있고 높은 자리에 있던 의로운 욥이 곤경에 처한 이들을 어떻게 섬겼는지 알려줍니다.
욥은 하소연하는 가련한 이와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신앙의 삶으로 “눈먼 이에게 눈”이 되고 “다리 저는 이에게 다리”가 되어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병자들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둘째, 마음의 지혜는 형제자매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픈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아픈 이들 곁에 머물면서 우리의 사랑을 전할 때 그들은 사랑과 위로를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아픈 형제자매와 묵묵히 함께하는 동행의 가치를 깨닫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청합시다.
셋째, 마음의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형제자매를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고 다른 이들을 돌보며 책임지는 것의 가치를 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형제자매를 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넷째, 마음의 지혜는 형제자매를 심판하지 않고 그들과 연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아픈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찾아가, 그들 곁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참사랑은 심판하지 않는 나눔이며, 다른 이들의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나눔입니다.
또한, 남이 칭찬해 주기를 바라고 좋은 일을 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거짓 겸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끝으로, 인간의 고통, 특히 무고한 고통에 대한 이 사랑의 응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상처는 신앙의 걸림돌이면서 신앙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질병과 외로움과 무능력으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기 힘들 때에도, 고통은 은총을 전하는 탁월한 경험이며, 마음의 지혜를 얻고 키우기 위한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의 신비에 잠긴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이를 받아들일 때 신앙의 산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머리로 고통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이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성모님께서 모든 병자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어 그들의 믿음과 희망을 북돋아 주시기를 빌며, 하루빨리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