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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주일(2015.1.18) 오대일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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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희스콜라스티카 작성일15-03-01 23:11 조회15,69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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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주일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부르심입니다.

 

먼저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으나, 처음에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스승인 엘리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의 인도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시몬은 동생 안드레아의 인도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항상 부르시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하느님을 따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흔히 부르심이라고 하면, 사제나 수도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사제나 수도자만이 부르심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덕과 자기 직분의 완덕을 추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교회헌장 42항).

 

하느님께서 친히,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큰 지를 알려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가 받은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기 위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먼저 성서는 우리에게 여러 사람이 체험했던 부르심의 장면을 전해줌으로써, 우리의 소명을 보다 깊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위엄을 체험하게 되고, 피조물로서의 실존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우리를 동참시키고, 당신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에 참여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부르심은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하나의 초대이며 선택이지만, 우리 편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겸손과 감사의 응답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신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이 예수님을 직접 부르시는 장면은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명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즉, 성부께서 당신을 세상에 보내셨고(요한 10,36), 이것은 성부께서 당신을 시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3,17).

또한, 성부께서 당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것처럼 당신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7,18).

 

한편, 지난 주일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장면에서 하느님은 예수님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밝히셨는데,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탈출기 12,11-13에 나오는 파스카의 희생양을 가리키는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전날 밤에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자신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어린양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죄 없는 양이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이 대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사야 53,7에 나오는 어린양으로서, 그 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으며, 결국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묵묵히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결국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미래의 운명을 예언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계속해서 요한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를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습니다.

 

우리도 일상생활 안에서 수없이 선택의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요한의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했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냄으로써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얼마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있는지 반성해봅시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시몬의 이름을 게파라고 바꾸어 주심으로써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름을 바꾸는 것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창세기 32,38),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창세기 17,25) 변한 것이 그 예입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을 받습니다.

세례명이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해서 부르심의 응답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르심은 단 한 번의 응답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하여 거듭 반복되는 부르심과 응답으로 재확인되고, 성숙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혼인서약을 했다고 해서 부부간의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수도서원이나 신품성사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완덕에 이르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처음으로 응답하는 세례성사는 평생을 통하여 연장되는 단 하나의 응답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시작된 우리의 응답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매 순간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기꺼이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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