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대림 제1주일(2014.11.30) 오대일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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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희스콜라스티카 작성일15-02-10 23:36 조회17,099회본문
나해 대림 제1주일
이제 올해도 한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를 돌이켜보면 기쁨과 보람도 있겠지만, 아쉬움과 후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해를 마무리짓는 시기에 우리는 대림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즉, 세상 달력으로는 한해를 마무리짓는 시기이지만, 교회 전례력으로는 새로운 해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인생의 시작과 마침이 묘하게 맞물려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림시기를 보내며 한해를 잘 마무리짓는 동시에 새로운 해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란 시를 보면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기다리는 설레임이 때로는 만남보다 더 좋을 때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기다림은 반드시 만나야하는 기다림입니다.
즉,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동시에 언제 올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이란 공적으로는 최후심판의 날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아등바등합니다.
그러나 “일장춘몽(一場春夢)”이란 말처럼 인생의 부귀영화는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도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시편 90,4-6)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루가 (12,16-21)에서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에서도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소출을 얻게 된 부자는 더 큰 창고를 지어 곡식을 쌓아 두었으나, 그날 밤 죽음으로써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하늘나라에 복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기다림의 심정은 두 가지인데, 바로 설레임과 초조함입니다.
즉 기쁘고 좋은 일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은 설레이는 반면에, 불안하고 두려운 일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은 초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기다리는지 아니면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차라리 주님의 재림이 더디 오기를 바라는지 생각해봅시다.
주님의 재림이 진정으로 기쁘고 복된 날이 될 수 있기 위해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게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던 것처럼 항상 깨어 있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특히 평소에는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다가도 어려움이나 고통이 닥치게 되면 하느님을 찾기보다 나 자신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이나 고통이 닥칠 때 오히려 하느님께 더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
당신 아닌 다른 신이 자기를 고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라고 말했고,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바로 옆에 오셔도 볼 수가 없고 만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바라봐야 합니다.
나의 관심사와 내 삶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혹시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현세적인 욕심에만 사로잡혀 있지는 않는지?
내 재산을 어떻게 모을까? 내 욕심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혹시 마음이 기울어져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관심이 엉뚱한 곳에 쏠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바로 곁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을 만났고, 또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을 비롯하여 과부들과 병자들, 고아와 고통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믿음을 어여삐 보시고, 그들을 위로해 주시며 함께 해 주셨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서 이 세상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며,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란 나 중심의 생활에서 떠나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욕심이 많은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에게 “기도하지 않고서는 악령을 쫓아 낼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기도하지 않고서는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 주일 최후심판에 관한 복음말씀에서처럼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하고만 사랑을 주고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결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자기 자신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께서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감사의 기도보다는 하느님께 특별한 무언가를 청하는 기도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특별한 무언가를 청하기 전에 나에게 주어진 평범함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항상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 5,16-18)
예수님께서 수 백 번 수 천 번 베들레헴에서 다시 태어나신다고 해도 그것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그분이 내 안에 태어나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가오는 이번 성탄에는 주님께서 진정 내 안에서 태어나실 수 있도록 대림시기를 뜻깊게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