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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사순 제3주일(2015.3.8) 오대일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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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은희스콜라스티카 작성일15-03-11 23:31 조회15,78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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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사순 제3주일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어느덧 사순절도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지 돌아보며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분노를 터뜨리시며 폭력까지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도 죄인들에게 너그러우셨던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에게는 유난히 채찍으로 내치시며 쫓아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도 화를 내셨을까요?

 

사람들의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과 계명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돈벌이에만 치우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혹시 신앙생활의 목적이 하느님이 아닌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함은 아닌지 반성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과 평화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려고 사랑의 매를 드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파스카의 희생제물까지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파스카의 의미를 깨닫고 다가오는 파스카 축제를 기쁘게 맞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파스카 축제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해방축제로서 대개 4월 중순경에 거행되었는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반경 30km 안에 있는 성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습니다.

또한 이 축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로서 타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도 이 날만큼은 가급적 고국으로 돌아와 함께 참여했습니다.

 

따라서 장사꾼들은 대목을 맞아서 제사 때 바쳐지는 동물의 값을 비싸게 받아 폭리를 취했으며 성전에 바쳐야 하는 세금도 세상에서 통용되는 돈이 아닌 성전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돈만 받았기 때문에 환전상들의 횡포도 아주 심했습니다.

이와 같이 부정한 일들이 바로 파스카 축제 때에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대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께서 나중에 엉뚱한 모함과 누명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 처형으로 말미암아 흘리게 된 예수님의 피가 바로 출애굽 사건 때 흘린 양의 피처럼 인류를 구원하는 새로운 파스카의 피가 된 것입니다.

 

한편,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전은 바로 예수님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또 하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과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 내십시오.”(1고린 6,19-20)

 

이와 같이 우리의 몸은 너무나 비싸고도 거룩한 몸입니다. 그

런데 우리는 혹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장삿꾼과 환전상들처럼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습니까?

만약 성전인 우리가 더럽혀졌다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셨듯이 우리 안에서도 더러운 것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쫓아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작년 8월, 교황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교황님께서는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의 이 말씀은 대형화, 세속화되어가는 한국 교회에 대한 경고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대형화, 세속화되어 부자들을 위한 교회라는 비판과 함께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이 교회에서마저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교황님께서는, 교회는 무엇보다 몸소 가난의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을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선포하신 기쁜 소식의 대상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또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 등을 통해 가난에서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헛된 일인지 깨우쳐 주시면서, 지상 재물에 초연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하십니다.(루카 12,33-34)

사도들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기억’(갈라 2,10)을 늘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야고보 사도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가 되려는 유혹에 대해 강하게 꾸짖었습니다.(야고 2,3-6)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야고보 사도는 보다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7)

 

또한, 교황 레오 13세는 『노동헌장(1891)』에서 “가난한 노동자도 모두 교회의 자녀이며 인간으로서 똑같은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역설하셨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걸음 더 나아가 회칙 『사회적 관심(1987)』에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시면서 “이 세상의 재화는 원래부터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42항). 

 

또한『가톨릭교회 교리서』제544항에서 “정결·순명과 더불어 복음삼덕의 하나인 ‘가난’은 그리스도의 길이며 교회의 길이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실천적 사랑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로 제시한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몫임을 천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이상은 오랫동안 이상에만 머물러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이유를 ‘번영에 대한 유혹’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교회를 가난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교회를 단순한 ‘사교 모임’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교황님은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이며,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난다.”고 지적하셨습니다(2항).

 

세상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도 빈부격차와 가난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서 위로를 찾아야 할 가난한 이들은 생업에 종사하거나,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 교회를 찾지 못하고 중산층 신자들이 교회의 주류를 이룹니다.

교황님의 지적대로 신앙생활이 나 자신의 이해와 관심에만 갇혀 있을 때,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교황님은 “가난한 이들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얻지 못할 것”(202항)이라고 말씀하시며,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198항).

 

우리 자신을 복음화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들 마음의 성전부터 정화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똘똘 뭉쳐진 교만과 이기심, 편견과 미움, 시기와 질투의 덩어리를 깨부수고, 새로운 마음의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낡은 성전을 헐어버리고 새 성전을 세우신 것처럼, 우리도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썩을 대로 썩은 우리 마음의 낡은 성전을 허물고 새로운 마음의 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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