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09.22) 고찬근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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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4-09-22 15:33 조회643회본문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신앙은 떨리는 모험”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가 피를 흘린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200여 년 전, 우리 교회는 조선왕조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신유․기해․병오․병인 박해가 진행되던 100년간에 걸쳐 대략 만여 명의 신자들이 이 땅에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는 교회가 세워진 지 불과 10여 년 만에 당하게 된 큰 시련이었습니다. 당시 희생된 순교자들은 세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하느님이 모든 이의 어버이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현세의 지위나 재산보다 하느님을 더 앞자리에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순교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단순히 머리로써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증거하고 실천한 분들이었습니다. 우리 순교자들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이가 평등함을 알았기에, 그 당시 신분제도의 악습을 거슬러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대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새로운 삶을 통하여 묵은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대박해가 있던 1801년 신유 년, 북경교구장 명에 따라 조선에 들어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집전하고, 신앙을 다져주던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이 계셨는데, 조정에서 자신을 잡기 위해 신자들에게 아주 심한 박해를 가하고 있음을 알고 마침내 자수하여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또한, 당시 총회장이던 최창현 요한 순교자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앙을 위해 투신했습니다. 명도회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나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도 겨레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 바쳐 노력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첫 박해 때의 그들의 순교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수차례의 대박해를 거친 한국교회에는 103위 성인뿐 아니라 124위 복자도, 무명 순교자도 많이 계십니다. 이분들은 모두 복음의 증인이요 실천가였습니다. 순교자의 후예인 우리는 순교자들이 못다 이룬 민족 복음화의 꿈을 실현해나가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신자라는 것이 알려지면 도움이 되기보다는 불편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람 많은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하려면 좀 쑥스럽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 때 사회의 관행을 따르자니 양심이 걸리고, 사업을 위해 사교를 할 때 윤리적인 문제도 발생합니다. 이렇듯 신앙이 삶의 걸림돌이 될 때도 있겠지만, 오늘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신앙 선조들의 신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당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양반이라는 지위는 물론, 집과 재산도 빼앗기고, 친하게 지냈던 이웃과 친척들도 모두 등을 돌리게 되고, 결국에는 목숨까지도 신앙을 위해 내놓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는 그 한마디 말을 하지 못해 칼춤 추는 망나니 앞에 목을 내밀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 그 적막함, 그 외로움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우리 신앙 선조들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택했습니다. 그분들의 외로운 죽음 덕분에 지금 이렇게 우리 교회가 존재하고, 우리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신앙 선조들처럼 목숨을 던지며 피를 흘리는 그런 순교는 못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여러분들의 신앙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라, 매일의 갈등 속에서, 선택의 갈림길에서 쉬운 길들을 포기하고 결국은 하느님을 선택하는 떨리는 모험이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