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가해 연중 제33주일(11.15) 오현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강론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강론

2020 가해 연중 제33주일(11.15) 오현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0-11-15 17:26 조회8,783회

본문

1/15  한인성당 강론 (오현철 프란치스코 신부)

 

 

 

도쿄 한인성당 신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7 1일 명동성당에서 하느님 은총으로 서품 받고, 지난 9 11일에 일본에 돌아온 예수회 소속 오현철 프란치스코 신부라고 합니다. 이번에 포함 다섯 명의 새사제가 서품의 은총을 받았는데, 관구장 신부님께서 농담으로 올해의 사제들은 코로나 사제들이라고 신자들에게 소개해 주셔서 모두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제들이니 만큼 교황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만났던 사람들, 잃고,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사제, 냄새 나는 사제, 착한 목자가 되어달라고.. 덕담해 주셨습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신앙생활도 슬슬 지치고 미사도 평화방송미사로 대체하다가 본의 아니게 쉬게 되는 신자 분들이 많으신 것으로 압니다. 신부로서 미사 다니면서 그런 분들을 만나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오셨다고. 자책하지 마시라고. 탓을 하시려면 차라리 코로나 탓을 하시라고.. 본심은 신앙생활 더 잘하고 싶으셨던 거 잖아요. 그쵸? 코로나 때문에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하느님 죄송하고 말씀드리고, 분하다고 그러니 필요한 은총 주시라고 기도하라고요.”

 

 

혹시 오늘 성당에 오랜만에 얼굴 보이는 교우분들 계시면 따뜻하게 환영해 주세요, 정말 어렵게 잘 오셨다고 서로 격려의 인사 나누시면 좋겠습니다.

 

 

흔히 새 사제에게 있어 첫 미사는 허니문 같은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한국에서 서품 후부터 지금까지 (1) 이렇게 본당에서의 신자들과 봉헌하는 미사나 (2) 전국에 흩어져있는 수녀원과 예수회 공동체 등을 찾아 방문하며 서품에서 받은 은총과 복을 나눠드리고 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언제부터 어떻게 하느님께서 저를 불러 주셨을까?” 생각하고 되짚어 보게 되니 저에게도 참 좋은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혼의 기분으로 신자 분들을 뵈면 다들 어떻게 결혼에 골인하셨어요?”와 같이 어떻게 신부가 되셨어요?”라는 질문이 제일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긴 강론이 될 지 모르겠지만, 하느님과 제가 걸어온 성소여정을 좀 나누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1. 첫번째, 신자로 부르심. (신앙의 유산)

 

 

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불리던 태명이 하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복돌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무슨 강아지 이름 같기도 하고 왠지 촌스러운 이름이 싫었습니다. 게다가 이모님이 일곱 분이나 되시니 한 분 한 분씩만 불러도 도망가고 싶었던게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너는 복을 타고 났으니 누리라는 의미인지, 앞으로 복을 빌어주고 나누는 사람으로 살라는 의미인지. 이렇게 수도자로서 기쁘게 잘 살고 있고, 신부까지 되고서 보니 후자의 의미가 맞는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화()보다는 복()을 많이 어머니께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그 복()이란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진 것.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이 바로 저희들이 타고난 복입니다. 신앙이 타고난 복이라고 말씀 드리는 이유는 신앙은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 받은 저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신앙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지금 현재의 우리 교회가 있고, 선교사들이 흘린 땀과 열정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니 우리도 늘 감사하며 보은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그 후손들에게도. 그것도 천대에 미치도록 주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저희 집안도 신앙이 외할아버지를 시작으로 3대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의 외가는 목포 유달산자락의 북교동 성당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당시 선교하러 오신 아일랜드 출신의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 신부님으로부터 외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시작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성당에서 사목회장직을 하시며 자식들에게 신앙교육을 아주 철저히 시키셨다고 합니다.

 

 

2. 두 번째, 신부로 부르심

 

 

어렸을 적 기억에 성당은 친구들도 많이 있고, 선생님들도 계시고 해서 저에게는 마치 또 하나의 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결혼하신 후에는 광주 농성동 성당에 다녔는데, 저는 어머니가 어른들 미사 드리는 것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다리다 가끔 성전 문 틈을 빼꼼히 들여다 보면 신부님께서 분향하시던 모습이랑 향 냄새가 새어나오던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것들이 기억납니다.

 

 

이렇게 저는 소위 성당 마당에 놀며 자라난 아이로 가끔은 성당 가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발길을 돌려 어린이미사를 땡땡이도 쳤고요. 남동생과 유아실에서 떠들다가 한번은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거기 둘 유아실에서 떠들고 있는 놈들 나와하고 부르셔서 강론대 앞에서 호되게 혼난 기억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부님께 혼나던 날 어머니는 모르시겠지 했지만, 집에 돌아가니 이미 아시고 계시더군요. 성당에 가면 친구들이 많아 좋았지만, 어머니의 신앙을 강요하는 그런 분위기는 싫었던지 어린시절 저는 신앙면에서는 어머니 손바닥 안에 있는게 조금은 답답하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지나면서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픈 반항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에는 이게 어머니 신앙이지 제 신앙은 아닌 것 같아서 성당에 다니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따로 책장이 없으셔서 제 책상 위에 한 두 권씩 본인의 신앙서적을 제 참고서 사이사이에 끼워 두셨기 때문에. 저는 공부하다가 심심할 때면 가끔 이게 무슨 책인가 한 권씩 뒤적거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제 인생을 바꾼 두 권의 책과 만나는데요, 먼저 소개하고 싶은 책은 박도식 신부님의 무엇하는 사람들인가」라는 교리서였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유아세례까지 받고 처음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머리와 마음으로 알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군대에서 그 책으로 후임 3명이나 세례 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던 걸 보면 참 좋은 책 같습니다. 그렇게 제가 다니던 성당이 어떤 곳인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제가 믿는 신앙의 내용을 처음으로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특히 7성사를 하나씩 하나씩 읽어내려 가면서 실제로 성당에 가면 해 보자는 생각으로 잘 준비해서 고해성사를 드리러 갔는데 고해소에 들어서는 순간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게 되어서 적어놓은 죄 목록을 다 고해했는지 어쨌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고해소 밖을 나선 적도 있었고요. 그때부터 저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눈물은 마구마구 쏟아지지만, 마음만은 뭔가 막혔던 게 뻥 뚫린 듯 후련하다고 할까 가벼워지고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도 어머니께서 전략적으로 꽂아 두신 것일지도 모르는 또 다른 책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가르멜 제3회원으로 재속 수도생활을 하시며, 신앙생활을 깊이 하고 계셨는데요. 그것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천주자비의 글」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나중에 신학생이 되어 다시 봐도 굉장히 난해한 영성서적인데요. 적어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익숙한 개념이지만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하느님이 제가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고 판단하시는, 죽어서야 뵐 수 있는 옥황상제 같은 분이셨기 때문에 성녀가 말씀하시는대로 나의 님, 나의 사랑, 늘 지금 나와 함께 살아서 대화할 수 있는 연인처럼 기도하는 법을 전혀 알지 못했었습니다.

 

 

밖에 다른 책들도 많이 보았지만 그때야 비로소, 눈에서 막이 떨어진 바오로 사도처럼 성당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의 존재도 처음으로 제 눈에 들어왔고, 신부님들의 삶이 18년 만에 눈이 뜨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나 같은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막연하게나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신부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중학교 때는 산업디자인과 같은 곳에 진학하여 설계엔지니어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3때는 꿈과 상관없이 다들 학교서열로 진학하는게 싫어서 점수랑 적성에 맞는 곳을 찾았을 때, 한국해양대 운항과에 입학하고 싶었습니다. 모두 어머니께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접었습니다. 하물며 신부 되기 위해 신학교 가겠다는 이야기는 꺼내기도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를 이길 수 없어서 당시 입학한 학교가 행정학과입니다. 진로에 맞지 않아서 입학하고 나서도 한동안 방황을 많이 했는데, 당시 마음을 잡아 준 곳이  가톨릭학생회라는 동아리였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동아리라 선배님들 중에는 벌써 신부가 되신 분들도 여럿 계셨고, 동기들 중에서도 성소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함께 성지순례도 가고, 기도모임도 하고 좋은 추억이 정말 많았습니다. 대학 동아리 활동이 저에게 참으로 많은 좋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3. 세 번째, 선교사로 부르심

 

 

실제 신학교 입학은 2005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 2006년 부모님께 겨우 허락을 얻고, 입회한 곳이 지금 제가 소속된 예수회가 아니라 처음엔 한국외방선교회였습니다. 막상 허락은 받았지만, 당시 저는 기도 안에서 그 동안 너무 부모님 말을 하느님 말씀보다 더 잘 들어 왔다는 반성이 들어 하느님께 죄송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외방선교회 후원회원이시기도 하셨기 때문에 소식지 등을 보며 영향을 받았겠지만, 저도 신부님들이 안 계시는 선교지에 가면 하느님께 덜 미안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선교에 대해서는 너도 모르고 열정만 가지고 너무 준비없이 시작한 게 결국 나중에 화근이 되었습니다. 성소의 위기라고 하는데 저에겐 그때 처음으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심적으로나 영적으로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것을 외방선교회 3년차, 대만에서 깨달았습니다. 대만은 그때 당시에 평일미사를 드리면 신부님과 신학생 둘만 미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시 되던 곳이었는데, 할 일이 딱히 없는 날은 열심히 잡초를 뽑으면서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라고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이 선교실습 중에 마지막 한 달을 예수회 벨기에 신부님께로 보내졌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완전히 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한가할 틈이 없는 사목활동 안에서 어떤 신성한 힘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안 찾아오면 내가 찾아간다.”는 열정으로 중국어를 쓰는 나라에서 원주민 말을 또 다시 배우느라 바쁘시다고 하는 신부님 앞에서 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정말 같은 곳이 맞는지.. 한 쪽은 안 오는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고, 다른 한쪽은 찾아 다니느니라 바쁘고.. 20대 후반이었던 젊은 신학생인 제가 신부님 사목 따라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어 신부님은 언제 쉬세요?” 라고 물으면 웃으시면서 선교사는 틈틈이 쉬는 시간이 많다고만 하시는데 정말 멋있더라고요

 

 

4. 네 번째, 수도자로 부르심

 

 

그때 처음으로 수도자로 사는 것에 대해서 큰 매력을 느꼈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예수회에는 공동체의 날이라는 것이 있어서 하루는 초대받아 갔더니, 예수회원들이 아무리 바쁜 미션을 수행하더라도 반드시 일주일에 한번은 모여서 함께 미사와 저녁식사, 나눔 등을 하는 시간인데요. 일주일에 한번 얼굴 보는 시간인데도 마치 10년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 부둥껴 안고, 서서 못다한 대화 나누느라 식사도 늦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삶이 기쁘게 보였습니다.

 

 

무엇이 이토록 이 사람들을 기쁘게 할까?” 그때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의 매력도 느꼈고, 저도 이들과 같은 행동양식으로, 진정한 미션너리로서의 삶에 동참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제게 있어서 선교는 이제 더 이상 외국에 나가야만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하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5. 다섯 번째, 미셔너리로

 

 

다시금 제 안에 성소 초기에 느꼈던 전율이 느껴졌고, 그러한 삶을 상상만 해도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행복해지는 마음이 느껴져, 귀국 후 용기를 내어 소속 선교회 장상에게 허락을 받고, 예수회로 옮기는 프로세스를 밟았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예수회에 입회할 수 없고, 수도회 바깥에서 1년 동안 지원자 생활을 해야 했는데. 저는 다행히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출소자들을 위한 쉼터, 자립을 위한 지원센터인 교정사목위원회에서 입회할 때까지 머물렀습니다. 저는 그때 만났던 사람들 한 분 한 분이 지금 생각하면 예수님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도회를 옮긴다는 것은 당시 저로서는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제가 그분들에게 이런 저런 사정 이야기를 할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분들은 신학생과 신부님은 알아도 외방선교회가 뭔지, 예수회가 뭔지 전혀 모르시니까. 오히려 그분들의 딱한 사연을 저는 들을 수 밖에 없었고, 저도 그분들 이야기를 접하면 접할 수록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저의 고민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아주 담담해 지면서 자유로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분들의 사연이 귀에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서서히 그분들의 아픈 사연이 귀에 들어오면서 내 안에서 치유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예수회에 입회하여 10년 양성기간을 거치는 동안 정말 여러 가지 미션으로 파견을 받았고, 미션을 수행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점차 감사하게도 지금은 막연하게 생각되었던 미션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대만에서 만난 예수회 신부님의 삶이 보다 더 잘 이해가 되고, 제가 20대 후반에 뵈었던 그 신부님처럼 저도 내면에 기쁨과 자유로움을 꽤 많이 얻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저는 돌아서 돌아서, 또 하느님께서는 저를 이렇게 돌려서 돌려서 예수회에서 미셔너리로서 살 수 있도록 불러주셨고, 쓸만한 모습으로 다듬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이 사이에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가르쳐 주셔야 할 것이 참으로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수사님은, 신부님은 하느님 체험이 대단하신가 보죠?”

그러면 죄송하지만 아니라고 대답해 드립니다.

 

 

또 누가 저의 성소를 짧게 한단어로 표현해 보라 하면, 저는 하느님께 대한 호기심인 것 같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매력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늘 제 눈 앞에 비친 하느님은 반짝 반짝하게 빛나는 보석과 같은 것들로 저의 호기심을 자극하셨습니다. 그 호기심에 겁도 없이 길을 나선 것이 여기까지 저를 안내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그 빛을 잃어버리고 당황해 하거나,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도 느꼈었지만, 저는 그때그때마다 예수님께서 필요한 도움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저의 성소 이야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이 자라나는 것이 보이시나요?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라! 저 성녀는 뭐지?” 늘 안 보이다가 문득 신부님으로 사는 삶이 눈에 들어오고, 선교지에서는 어라! 저 신부님은 나랑 달리 척박한 환경에서 조차 어떻게 기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출소자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는 사이에는, “어라! 어느 순간 고민이 사라졌네?” 이렇게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큰 고통 앞에서면 그보다 작은 고통은 치유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죄와 고통, 삶의 어려움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문과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죄와 고통을 인식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잘 찾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서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그 달란트가 우리 각자에게 매 순간 주어지는 십자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새 신자들께 자주 말씀 드리는데요. 역으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도하기 어려울 때인 지금이, 어쩌면 가장 기도하기 좋은 때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는 본인이 꼭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기도하기 어려울 때 부탁할 수 있는 사람들을 미리 많이 사귀어 두고, 서로서로 기도해 주고, 부탁도 많이많이  하시면서 삶의 어려움들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슬기롭게 잘 극복해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있으면 대림입니다. 일본사회에 첫발을 딛었을 때의 포부에 부풀었을 첫마음도 좋고, 결혼생활 시작했을 때의 설레였던 첫마음도 좋고,, 세례 받았을 때의 그 첫마음, 즉 각자에게 돌아가고픈 초심의 마음을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어려움도 은총도 상당히 많으셨을 것입니다. 곰곰이 돌아보시고 받은 것이 많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한번 더 주님을 찬미하시고, 아직도 진행형인 어려운 일이 있다면 도움의 기도를 간청하시는 은총의 대림시기 되시길 함께 마음 모아 기도 올리겠습니다. 착하고 충실한 종의 자세로 우리 한인성당 신앙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231
어제
1,516
최대
3,012
전체
1,922,021

Copyright © www.tokyo-koreancatholic.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