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나해 성령 강림 대축일(05.23)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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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1-05-23 16:32 조회6,578회본문
* 성령 강림 대축일 나해
“죽음의 흔적”
예수님은 우주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암행어사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이나 살았지만 그분이 암행어사인지 잘 몰랐습니다. 마패를 보여주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는 왕으로 모시자고 ‘으쌰으쌰’ 했지만, 십자가에 비참하게 매달리시자 뿔뿔이 도망쳤습니다.
시시하게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기가 죽은 제자들은 자기들도 다칠까 봐 어느 집 골방에 숨어있었는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서 나타나셨습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참된 암행어사이시구나! 이제 악당들은 모두 혼나고,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고, 우리는 한 자리씩 얻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숨을 죽이면서 예수님의 품속에서 나오는 비까번쩍한 마패를 보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예수님이 ‘짠’하고 보여주신 것은 못 구멍이 뚫려버린 두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복수 대신 평화, 잔치 대신 즉각적인 파견, 한 자리 대신 성령의 숨결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보통, 세상의 왕이 임명한 암행어사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지고 정의가 없는 곳에 파견되어 그것을 바로 잡습니다. 그리고 그 암행어사의 상징은 멋있는 마패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암행어사이신 예수님의 파견지는 평화가 없는 곳인데, 그분이 평화를 회복하는 힘은 죽기까지 용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 그분의 마패는 손과 발에 생긴 ‘죽음의 흔적’입니다. 예수님 손과 발에 생긴 죽음의 흔적은 바로 부활의 흔적이고, 그분이 생명을 관장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생명이 짧고 부활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힘, 즉 죽기까지 용서하는 그 힘은 부활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휴식과 상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즉각적으로 파견하신 것에 마음을 두어야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파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파견될 곳은 안정된 곳이 아니라 평화가 무너진 곳입니다. 든든한 경제, 편안한 집, 쾌적한 환경에 머물고픈 우리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평화가 없는 그곳에 파견되어 평화를 세우는 힘은, 돈과 권력과 학식 그런 것이 아니고, 바로 용서입니다. 나를 죽이는 사람들을 내가 죽기까지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용서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흔적을 우리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손발에는 그 못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