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다해 주님 세례 축일(01.09)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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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2-01-09 16:01 조회5,463회본문
* 주님 세례 축일 다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시끄러운 소음 속에 세상을 살아갑니까? 부디 작은 소리로도 의사전달이 가능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자연의 소리들을 다시 들으며 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빗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개 짖는 소리, 풀벌레 소리, 꽃이 피는 소리까지. 인간의 고함이 멈추고 이런 소리들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소리도 함께 들릴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갈대가 부러졌어도 꺾어버리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세상은 참 무서운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이겨야 살아남는 세상, 경쟁에서 뒤지면 누구라도 노숙자가 될 수 있고 잊혀지는 세상, 장애를 갖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힘든 세상. 때론 가까운 사람마저도 적이 되어버리고, 빈민들에게는 아예 관심을 끄고 살아가는 무정한 세상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던 삶의 여유는 어디 갔습니까?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고, 사랑의 대상은 결국 다른 사람들인데, 혼자 살아남는다면 사랑할 사람이 없는 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떤 분의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닮아야 할 하느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세 번째,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지치고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성실하게 공정과 정의를 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망과 좌절의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와 사상 그리고 빈부의 격차 때문에 생기는 무서운 테러와 전쟁, 개발도상국들의 발전을 허락하지 않는 선진강대국들의 견제구조, 그로 인해 생기는 국가 차원의 우울증과 정신질환 그리고 수많은 자살과 범죄들. 희망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원하십니다. 기죽지 말고, 자살하지 말고 끝까지 성실하게 바른길을 가기를. 개개인의 성실과 정의로움이, 거대한 세상의 폭력을 끝내는 이길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한 분 계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길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그분은 늘 조용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따로 기도하기 좋아하셨고,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들꽃과 새들을 비유로 가르침을 주셨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려와서 소리소리 지르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습니다. 또한, 빌라도 총독 앞에 잡혀가셔서도 그저 말없이 서 계셨습니다.
그 조용한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죄 많고 병든 우리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득하셨습니다. 쉬실 시간조차 없어도 구름처럼 몰려오는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모두 고쳐주셨고, 무릎 꿇고 애원하는 나병환자도 측은한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몰래 옷자락이라도 잡아야 했던 하혈하는 여인에게도 기적의 힘이 나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으며, 날이 저물어 허기진 사람 오천 명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배를 채워 보내셨습니다. 언젠가는, 죄 많은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눈물지으신 적도 있고, 친구 라자로의 죽음 소식에 울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성하게 고쳐주셨으며, 심지가 깜박거리는 등불을 꺼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시 기름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라는 큰 강대국에 먹혀버린 불쌍한 식민지의 국민이셨습니다. 혼란하고 불행했던 그 시대가 갈망했던 능력과 권위와 카리스마를 예수님은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영웅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면서, 성실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멋진 비유와 가르침들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정의로움을 우리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그분이 심어주신 성실과 정의는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안에 힘차게 살아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길이 이제는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길입니다. 겸손하고 조용하지만, 연민이 정이 가득하고, 성실하고 정의롭게 끝까지 걸어가는 그 인생길, 그 길이야말로 지금의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무정하고도 절망스럽기까지 한 이 세상을 이기는 바로 그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