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다해 부활 제3주일(05.01)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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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2-05-01 15:39 조회4,937회본문
* 부활 제 3주일 다해
“와서 아침 먹자”
제자들에게 3년이라는 행복했던 시간은 그들의 배반과 도주, 스승 예수의 죽음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있던 제자들은 절망의 터널을 어렵게 지난 후, 어부로서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물가에 서 계셨습니다. 권능을 떨치며 오신 것이 아니라 그저 물가에 서 계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큰 호들갑을 떠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이것은 베드로의 회복을 기다리시는 부활한 예수님의 조용한 시위입니다.
그 조용한 시위 속에 베드로는 서서히 깨달아 갑니다. 다시 자기 팔뚝을 믿고 어부로 돌아갈 것이 아니고, 역시 세상을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시기에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 자기의 남은 소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세 번씩이나 사랑 고백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 애(愛)자 세 개는 주님께 대한 배신을 면하고, 어떤 경우에도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면역주사인 것입니다. 그 한 번의 고백에 나태함이 깨어있음으로 변하고, 그 두 번의 고백에 무관심이 사랑으로, 그 세 번째 고백으로 미움이 용서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번의 사랑 고백을 하고나면 세상을 더욱 진실히, 더욱 정성껏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웃을 만나면서 매 순간 세 번씩 이 고백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배반의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질책도 아니고, 용서도 아니고, 더 큰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남자와 여자가 있지만 그 타고난 본성(Natura)은 같답니다. 남자가 남자다워지고, 여자가 여자다워지는 것은 사회의 환경과 교육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랍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날 때부터 선인과 악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환경이 사랑의 환경이었느냐 아니었느냐가 선인과 악인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착해지는 것이고, 미움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악해지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틀린 경우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사랑’이라는 그 말의 개념을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일 겁니다.
어쨌든 오늘 예수님은, 사랑 부족으로 생겼던 베드로의 그 배반의 상처 자리에 ‘사랑’이라는 치유 약을 세 번이나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에게 어떤 태도로 용서를 해왔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지못해서,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온갖 조건을 달면서, 다음에는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다짐 같은 것을 하면서 용서해왔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용서하는 자리는 못다 한 사랑을 마저 채워주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가 아니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