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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다해 연중 제26주일(09.25)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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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옥란빅토리아 작성일22-09-25 13:28 조회4,324회

본문

* 연중 제 26주일 다해

 

 

 

"진정한 부자"

 

오늘의 복음의 등장인물은 라자로와 부자입니다. 라자로는 죽어서 천당에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신다라는 뜻이랍니다. 라자로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그는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던 중증 장애인에 거지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보면, 그는 아마도 세상에서의 험한 시련과 멸시와 고통을 통해서 한없이 겸손해졌고, 오직 하느님의 도우심에 자신의 몸과 생명을 맡겼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부자는 풍요로움과 편안함에 길들여져서, 자기 식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라자로의 고통에 무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이 자기의 현재와 미래를 영원히 보장해주리라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 지옥의 고통 속에 라자로에게 물 한 방울을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겸손한 거지와 자기만 알던 부자의 승부는 거지의 승리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다소 충격적인 오늘 복음의 이 이야기는, 단순히 돈 많은 부자를 질책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부자들에 대한 이웃사랑에로의 초대입니다. 부자들이 이웃과 나누지 않고 사는 모습이 안타까워, 나눔을 통해 참 기쁨과 평화를 누리라고 예수님은 강한 어조로 부자들을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누구를 부자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부자입니까 아닙니까? 얼마 이상의 돈과 재물을 소유해야 부자입니까? 부자는 남는 것이 있는 사람이지요. 남는 것이 많으면 큰 부자, 남는 것이 적으면 작은 부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는 것이 있어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남는 것이 백 원짜리 동전 한 개일 수도 천 원짜리 한 장일 수도 있습니다. 그 남는 것이 남을 위한 한 시간의 시간일 수도, 남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마음의 한 조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 나눌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남을 도와 짐을 들어 주는 데 돈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남에게 웃으며 자리를 양보하는 데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듯한 마음을, 다정한 눈빛을 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초대를 받은 부자들입니다. 하느님의 계속되는 창조사업을 돕는 협력자로 초대된 우리들입니다. 아파하는 세상을 치유하며 회복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 즉 시간은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그 시간을 돈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돈으로 변화시키는 데 여념들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돈을 소유하게 되지만, 대개 그 돈은 다시 허망한 시간으로 소비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게 번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지금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돈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가 시간으로 돈을 만들었다면, 그 돈은 다시 사랑으로 돌려져야 합니다. 신앙인은 시간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돈을 버는 과정의 시간까지도 사랑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필요 이상의 욕심이 빈부격차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빈부의 격차가 매우 큰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또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들을 시기하고 증오하는데 자기의 시간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녹은 쇠에서 나와 쇠를 먹고, 욕심은 사람에게서 나와 사람을 먹는다.'(법구경) 이런 말이 있듯이 욕심은 부자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나 좋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셨고, 철저히 사랑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빵 보다 하느님의 말씀이 중요하다고 하셨으며,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고 경고하셨고, 돈주머니나 식량자루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공중의 새들을 보라,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살펴보라고 하시면서, 물질적인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느님을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셨던 그분은 결국, 발가벗긴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암브로시오 성인은 예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의 가난은 우리를 풍족하게 해주셨고, 그분의 약해지심은 우리에게 힘을 주셨으며, 그분의 옷자락은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고, 그분의 단식은 우리의 배고픔을 채워주셨으며,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그분의 무덤은 우리에게 부활을 주셨도다!”

 

교우 여러분, 단 한 번뿐인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나눔으로써 행복해지는 삶이 있습니다. 나누지 않고 소유하고 있다가 허망함으로 끝날 삶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을 결정짓고 있습니다.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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