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가해 사순 제1주일(02.26) 안진형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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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3-02-26 16:52 조회3,919회본문
2/26 사순 제1주일 미사 강론
찬미예수님
동경한인본당 신자 여러분 1년 만에 인사드립니다. 작년 이맘때는 부제였는데 지금은 사제가 되었습니다. 지난해 5월 30일 사제서품식 이후 진즉에 인사를 드리러 왔어야 하는데 많이 늦었습니다. 실은 제가 평소에도 좀 많이 느립니다. 부제서품이 2013년 이었으니 신학교 동기들보다 9년이나 늦게 사제가 되었습니다.
부제로 지낸 9년 동안의 시간은 그동안 머리로, 지식으로 배워온 신학을 마음으로, 실생활로 받아들이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그 시간 전부가 행복했노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한때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온 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하느님을 의식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를 하느님께서 다시 불러주시고 사제서품이라는 큰 은총까지 내려 주셨습니다.
누군가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큰 시련을 주시고 모질게 단련시키시는 것은 분명히 무언가 큰 일을 맡기시려고 준비하신 것이다. 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큰 일은 이 세상이 말하는 큰 일, 겉으로 드러나는 대단한 일, 누구나 우러러 볼만한 업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도 모르는 외딴곳,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보면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들 각자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그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충실했을 뿐입니다.
저는 특히 오늘 복음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과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겹쳐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의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라는 부분인데, 루카 복음서에 의하면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루카 복음서에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 세 번이나 “제 자신을 구해보아라”면서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치 악마가 예수님께 뛰어내려보라는 유혹을 하는 오늘 복음의 “다음 기회” 인 듯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가장 비참한 곳, 외딴곳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순종으로 모든 다시금 인간은 은총을 회복했습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간이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서 멀어진 일을 이야기합니다. 은총이 가득했던 첫 인간은 죄로 인해 스스로 그 은총을 걷어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은총을 내려주시고자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는 한 여인의 순종이 필요했고, 그 위대한 여인이 바로 성모 마리아였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라고 그 여인을 칭송합니다. 첫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은총을 새 하와와 아담의 순종을 통해 다시금 우리에게 내려주십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봅시다.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신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또 다시 유혹을 이겨내시는 예수님.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곳은 베들레헴의 마구간, 피난생활의 에집트, 거친 광야와 황량한 사막, 마침내 골고타의 언덕에 이르기까지 늘 이 세상의 낮은 자리입니다. 이 사순시기를 맞아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내 그 십자가에 못박힐 각오로 이 사순의 시기를 은총의 시기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티아서 6장 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