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만찬 성목요일(04.06)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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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3-04-07 13:53 조회3,642회본문
* 주님 만찬 성목요일
“밖으로 나가는 식사”
이 밤은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를 기념하는 밤입니다. 밥을 먹는 것은 일상사(日常事)이고, 어느 집이든지 비슷한 광경일 것입니다. 조금 우아하게 식사(食事)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모두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 비슷할 것입니다. 아주 맛있는 음식이 나오거나, 식구(食口)가, 즉 밥 먹는 입들이 많다면 젓가락들이 부딪치면서 야릇한 본능도 발동할 것입니다. 세상에 나온 아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첫 행동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행동인 것처럼 식사는 본능적인 것이고, 그것이 밖으로부터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식사는 비슷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후 만찬은 참 이상합니다. 그분의 식사는 아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식사는 안으로 들어오는 식사가 아니고 밖으로 나가는 식사였습니다. 그분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당신이 드시지 않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게다가 그 빵에다 당신의 인격과 생명을 실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그분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다른 식(式)으로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소중한 깨달음을 남겨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일인 식사를 다르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사랑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 발을 씻어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발을 씻는다면 뭐가 특별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너의 발을 씻어줄 때는 아주 특별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 향할 때는 별 의미가 없지만, 내가 너로 향할 때는 많은 의미가 발생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늘 자기에게로 향하는 우리가, 남에게로 향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셔서, 마지막 밤에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만약에 그 밤에 자기 빵을 자기가 먹고, 각자 자기 발을 자기가 씻고 헤어졌다면 아주 싱거운 밤에 되었을 터인데, 예수님이 빵을 나눠주시고, 발을 씻어주셨기에 그 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밤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시대에 배고파서 죽는 사람보다 과식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 식량이 모자라 굶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인구가 적어서 사람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내가 너에게로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밤은 바로 내가 너에게로 향하고, 내가 스스로 너에게 먹히어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사랑의 밤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하나 되는 것은 거룩한 일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성체성사(聖體聖事)라고 부릅니다. 성체성사는 ‘내가 먹히어 내가 죽는 것’보다 ‘나를 먹는 네가 살아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우 여러분, ‘역지사지(易地思之), 이웃을 내 몸 같이...’ 이런 것들이 말은 쉽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들입니까? ‘팔이 안으로 굽지 내굽나?’라는 속담처럼 내가 너에게로 향하는 이 방향전환은 팔을 밖으로 꺾는 아픔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팔을 밖으로 꺾는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먹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의 본(本)을 따를 때 세상은 정말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