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나해 연중 제2주일(01.14) 고찬근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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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정혜올리비아 작성일24-01-14 16:09 조회2,561회본문
* 연중 제 2주일 나해
“우리 성소(聖召)는 사랑”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소리를 듣습니다. 시계소리, 자동차 소리, 사람들 북적이는 소리, 노래방 소리... 천둥소리, 시냇물 소리, 심장 뛰는 소리, 아가의 하품소리, 눈 쌓이는 소리...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답니다. 소리가 너무 작아도 들을 수 없고, 소리가 너무 커도 못 듣는답니다. 그래서 꽃이 피는 작은 소리라든지 지구가 돌아가는 엄청난 소리는 듣지 못한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지만, 그것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온갖 잡음을 따라 갈팡질팡합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주신 인생이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 즉 성소(聖召)를 따라야 합니다. 보통, 성소를 성직자나 수도자로 불림을 받는 것으로 생각들 하지만, 넓게 봐서 성소는 ‘하느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분에 있든 우리는 성소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소를,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들리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이 묵고 계시는 곳에 가서 예수님과 하루를 지내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요? 예수님이 묵고 계시던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예수님은 항상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가운데 계셨고, 날이 저물도록 그들을 고쳐주시곤 하셨습니다. 급기야는 인간이 지은 죄의 상처를 치유하시고자 당신 손발에는 못 구멍이 뚫렸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그곳,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던 그곳은 바로 ‘아픔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예수님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운 세상이라지만, 아픔의 자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눈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그 아픔의 자리에 이제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더욱 간절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여기 아픔이 있다. 이제는 너희들 차례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파하는 그곳에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안전지대에는, 무풍지대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없습니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픔에로의 초대’입니다. “아픔을 보고, 아픔을 체험하고, 아픔을 치유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하느님의 부르심은 아픔이 있는 곳에 있건만 우리의 몸은 마냥 편하기만 원합니다. 뛰는 것보다 걷는 것이 편하고, 걷는 것보다 서 있는 것이, 서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 있는 것이 편합니다. 또 그냥 누워 있는 것보다 잠자는 것이 더욱 편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편한 것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육체적 편함의 마지막은 무의미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늘 편안함을 떠날 줄 알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습니다. 육체는 쾌락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는 그릇이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도구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인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응답의 길입니다.
그 부르심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 귀를 열어놓고,
그 부르심을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크게 뜨고,
그 부르심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몸을 봉사의 도구로 만듭시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아픔이 있는 곳에 있고, 그 아픔은 오직 사랑으로만 치유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은 곧 ‘사랑’인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처럼 “우리의 성소는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