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다이토 구역미사(11.16) 고찬근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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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11-16 19:42 조회140회본문
* 다이토 구역미사 (루카 18,1-8) 2024. 11. 16.
"들어주시는 기도"
현대 인간의 문명은 날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화성까지 날아가서 화성 흙의 성분을 분석하고, 작디작은 유전인자를 분석하여 장구한 세월의 진화를 한 순간에 조작하려고도 하고, 손가락을 쓰지 않고 오직 뇌파의 힘으로 컴퓨터 자판을 치기도 합니다. 인간의 심리학이 이제는 하느님의 심리를 분석하기도 하고, 현대의학은 종교심을 담당하는 뇌의 한 부분을 찾아냈다고도 합니다. 인간의 학문과 기술과 의학의 발달은 하느님의 설자리를 점점 좁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람부는 벌판에 서있으면 외롭고,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밤과 낮 그 사이 하늘가 외딴곳에 호롱불 오두막이 그립기도 한 존재입니다. 숲속에 어둠이 내리면 엄마 잃은 가엾은 작은 새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용서 그리움과 슬픔, 희망과 믿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신비를 벗기고 싶지도 않습니다. 탄생은 기쁜 일이고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름다운 창조를 믿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이제와 항상 영원히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안아주시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시고 벗을 위해 피를 흘리시는 그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즉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도우심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우리는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려면 우선, 승승장구하는 과학기술과 물질문명 안에서 진정으로는 행복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서와 역사 안에서 우리 인간과 함께 살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언제까지나 우리를 사랑하고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께 항구하게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권고하고 계십니다. 기도가 항구하기 위해서는 쉽게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그 과부처럼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실망하는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이루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내 뜻이라는 것이 터무니없을 때 우리는 그만큼 쉽게 실망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일 년 365일 내내 푸른 하늘만을 약속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시사철 꽃들이 피어있는 길만을 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폭풍우 없는 바다, 슬픔 없는 기쁨만의 나날, 고통 없는 평화를 약속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힘든 노동 뒤에 휴식을 구하는, 상처에 새살을 달라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을 때 힘을 구하는 그런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 하느님께서 ‘그래’ 하고 응답하실 때 우리는 무척 기뻐하지만, 하느님의 응답이 없을 때는 쉽게 실망합니다. 하느님의 무응답은 기도가 터무니없는 욕심을 채우려는 것일 때 ‘그것은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때 우리는 실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도의 잘못된 부분을 잘 찾아보고 고쳐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그 무응답은 ‘기다리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대에 대해 하느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지금은 안 된다, 그러니 기다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응답의 뜻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합당한 내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혼자의 힘은 약하고 쉽게 지칠 수 있으므로 여럿이 함께 기도하는 것도 항구하게 기도하기 위한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더 즐겁고 오래가는 기도입니다. 매 순간을 기도로 채우는 화살기도도 참 좋은 기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권고를 따라 항구하게 기도하도록 더 노력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망하지 않고 항구히 기도할 때 과부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리 고약한 재판관이 있더라도 그 꿈을 이루어내는 과부가 있는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재판관은 아니시겠지요? 그가 아니고 과부라면, 진정으로 억울한 과부입니까? 그 억울함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다 생긴 억울함입니까? 아니면 내 욕심이 엉켜져 만들어낸,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억울함은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