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에 대한 궁금증 11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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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임신부 작성일14-01-06 22:08 조회10,462회본문
1. 마리아라는 이름은 어디서 비롯 된 것인가요?
2. 성모님에 대해서는 호칭도 많고 축일도 많은데 왜 그런가요? 3. 개신교 신자들은 성모상을 우상 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또 성모상의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은가요? 4.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스카풀라 나 기적의 메달을 하고 다니는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며 어떤 효과가 있나요? 5. 왜 하느님께 직접 청하지 않고 성모님을 통해 기도하나요? 하느님께도 중재자가 필요한 것인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중재와 성모님의 중재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6.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에서는 예수님보다 성모님을 더 사랑하는 게 아니냐며, 가톨릭을 마리아교라고도 비판하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7. 성모님이 곳곳에서 자주 발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8. 성모 발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 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9. 마리아를 ‘새 하와’라고도 하던 데 무슨 뜻인가요? 10.마리아가 현대 여성에게 던져주 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11.어떤 신학자들은 ‘성서의 저자 는 동정녀 잉태가 역사적 사실이냐에는 관심이 없었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동정녀 잉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리스어인 ‘마리아’라는 이름은 유다인들 사이에 자주 쓰였던 평범한 이름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미리암’이라고 하는데, 구약성서에 모세의 누이도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졌고(출애 15,20), 신약성서에서도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예닐곱 명이 나올 정도로 흔하게 사용되었던 이름입니다. 마리아는 ‘공주’나 ‘귀부인’을 뜻하는 이름으로 보여집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마리아는 유다 산골에서 신앙심이 깊은 평범한 처녀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남자아이에게는 흔히 하느님과 관련된 이름을 지어주었고, 여자아이에게는 마리아라는 이름 외에 라헬(어린 양), 살로메(평화), 에스더(별)와 같이 아름다운 자연물이나 좋은 뜻을 가진 단어를 이름으로 지어주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성서말고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이 풍부한 상상력 속에서 많이 저술되었는데, 이것을 외경 또는 제2경전(Apokrypha)이라고 부릅니다. 외경에는 마리아의 부모가 요아킴과 안나였고, 안나가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였는데 하느님의 특별한 허락으로 마리아를 낳았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외경의 이야기는 성서로 많이 유입되어 여러 가지 정감 있고 감상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후로도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신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으면서도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도운 성모님을 공경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성모님을 따로 독립적으로 공경하게 되면서 성모님께 대한 공경과 신심이 폭발적으로 증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샛별’, ‘바다의 별’과 같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영예로운 칭호를 성모님께 드리면서 성모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에도 성모님께 온갖 영예로운 칭호를 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창조주의 어머니’ 등등 말입니다. 이와 함께 성모님을 기리는 축일이 생겨나게 되었고, 지금까지 600여 개의 마리아축일로 계속 발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축일은 성모 마리아가 가진 신앙의 특성을 강조하고, 성모님을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축일은 1월 1일 천주의 성모마리아대축일, 3월 25일 주님탄생예고대축일, 8월 25일 성모승천대축일 등입니다. 이러한 칭호나 기념축일은 성모님께 대한 공경과 신심이 가톨릭교회내에서 확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중세 이후에는 성모님 공경과 신심이 너무나 과장되어 일부 신자들 사이에 성모님이 인간이 아니라 마치 하느님인 것처럼 떠받들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성모님 공경의 목적은 성모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향하지 않는 마리아만을 위한 공경은 참된 공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모상은 개신교 신자들이 말하는 우상이 아닙니다. 우상은 그 상 자체가 신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모상은 그 자체가 신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물로서 기도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성모상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께 공경을 드리기 위해 성상과 성화와 같은 상징물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생겨났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서나 구원역사의 내용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시각적인 교육자료가 효과적이었고, 그래서 여러 가지 동상이나 그림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성모상이나 성화, 십자고상…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상징물입니다. 성모상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신심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성모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성모님께 대한 다양한 신심이 반영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협력하는 성모님의 다양한 모습이 여러 가지로 묵상되고 반영되어 다양하게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또한 1800년 이후로 루르드나 파티마와 같은 곳에서 일어난 성모님 발현을 표현한 성모상이 추가되어 성모상은 더욱 다양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 동상이나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함부로 다루지 않듯이 성모상도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중세로 들어오면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다양하게, 때로는 과장되게 증가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행위도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1800년대에 일어난 성모 발현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더욱 극대화시켰습니다. 특히 1830년 7월 18일, 프랑스 파리의 뤼 뒤 박에서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는 ‘당신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 메달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메달’로 불리게 되면서 빠르게 보급되었는데, 이를 통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메달은 마리아의 발현을 상기시키는 상징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징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20년경부터 레지오 마리애를 비롯한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르려는 신심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1947년에 창설된 푸른군대 단원들은 특히 티 없으신 마리아의 성심께 자신을 봉헌하는 표시로 가르멜 산 스카풀라와 배지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1917년에 창설된 성모의 기사회 단원들은 기적의 메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카풀라나 배지, 메달은 성모 마리아께 자신을 봉헌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표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심단체의 단원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이러한 메달이나 스카풀라 등을 지니고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을 때 신부님께 찾아가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것은 성직자의 기도가 더욱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님께 우리를 위해 빌어달라는 기도 역시 성모님의 기도가 어느 누구의 기도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로마 15,1-6). 이러한 믿음이 ‘성인들의 통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듯이, 하늘에 계신 성인들께도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초창기 신자들은 성모님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종교개혁자들인 루터나 츠빙글리도 성모송과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 이후 개신교는 성모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를 중지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기도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계시고, 성모님의 청을 예수께서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성모님의 역할을 확신하고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 부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중재자라는 본래의 명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중재는 그리스도의 중재직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종속적인 중재입니다. 사실 우리도 세례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와 성모 마리아의 중재를 혼동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를 그리스도교(基督敎)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에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교회 초기 예수님께 대한 신학이 발전하면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도운 성모님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인간이시지만 오직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신 분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종속된 성모님을 점점 따로 떼어내어 성모님만을 독립적으로 공경하기 시작하였고, 성모님께 대한 신심과 공경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성모님께 대한 지나친 신심과 과장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신자들이 성모님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가톨릭이 마리아교라고 오해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구세주 하느님이시지만, 성모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위해 한평생을 봉헌하심으로써 우리 삶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는 그리스도뿐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종교입니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지나쳐서 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구세주로 믿는 마리아교라는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발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인데, 성모 발현을 통하여 전달되는 메시지의 초점은 인류의 구원에 있습니다.
그 내용도 어떤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알려진 계시 내용을 시대적 긴급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재앙의 예고도 협박이 아니라 위험에 처해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성모님의 간절한 호소인 것입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선익을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 발현의 진정한 의미는 신자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가 계시 진리나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면 올바른 발현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성모 발현 사건은 전 세계에서 2백여 건 이상 보고되었지만 다만 3건, 즉 포르투칼의 파티마(1917), 벨기에의 바뉘(1933), 프랑스의 보랭(1932)만이 교도권의 공식인가를 받았습니다. 산 다미아노, 루블란다, 헤롤드바흐, 가라반달, 베이사이드, 우리나라 나주 등 여러 곳은 공식적으로 부인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관할교구장이 조사 중이거나 최종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교도권의 최종적 결정에 겸손되이 순명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치유나 기적에 연연해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기적에 연연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성모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참된 신심은 일시적 감정이나 허황된 믿음에 있지 않고, 특별한 은사를 청하여 거기에 쉽게 매료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교도권의 정당한 결정을 거부하는 것은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고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합당한 순명정신이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건전한 신앙생활의 중심은 결코 사적계시가 아니라 정상적인 성사생활에 있는 것입니다.
성모 발현은 계시의 한 부분으로서 사적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발현과 사적계시가 참된 것인지를 결정하는 이는 관할교구장이며 최종적으로는 교황청에서 판단합니다. 사적계시에 대한 식별기준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교리적 기준으로 사적계시의 내용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해야 합니다. 둘째, 심리적 기준으로 사적계시를 체험하는 사람의 인격이 건전한 균형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정신착란과 같은 병적 소인이 없어야 하며, 환상이나 환시 속에서 과장되거나 조작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셋째, 영적 결실의 효과로써 영적인 결실들이 사적계시의 결과로 드러나야 합니다. 주교님과 교황님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교회를 운영할 권한과 책임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교도권이라고 합니다. 교도권은 신앙에 관한 모든 사항을 판단함으로써 잘못된 해석과 혼란, 나아가 분열로부터 교회의 일치를 유지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보고될 때 교도권은 이 발현이 신앙에 합당한지를 식별하여 최종적으로 판단합니다. 교도권이 성모 마리아보다 더 높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모든 신앙진리를 결정하고, 교회일치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특히 1985년에 시작된 ‘나주 성모 발현 사건’에 대해서 광주 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님은 조사위원회를 통해 면밀히 조사를 한 후 교도권의 이름으로 나주 성모 발현을 참된 계시로 보지 않고, 나주 성모 발현과 관계되는 일체의 신심행위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후임자이신 최창무 대주교님도 이를 재확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 성직자와 신자들이 반발하였는데, 어떤 경우에도 교도권을 거스름으로써 교회일치를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교도권을 중심으로 일치하는 것이 예수님의 명이고 성모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석을 놓은 신학자들을 교부라고 하는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신학이 발전되면서 교부들은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부들은 마리아를 인류의 첫 여인인 하와와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첫 여인 하와라는 이름은 ‘인류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교부들은 마리아를 ‘새 하와’ 또는 ‘제2의 하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유스티노(A.D.163)와 이레네오(A.D.202) 같은 교부들은 마리아를 하와와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와를 통해서는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해서는 삶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묶어놓은 것을 동정녀 마리아께서 믿음을 통하여 풀어주셨다.” 예로니모(A.D.419)나 아우구스티노(A.D.430)와 같은 교부들도 하와와 비교하여 마리아를 ‘살아 있는 이들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하와를 통하여 죽음이 왔지만, 마리아를 통하여는 생명이 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 여성신학은 전통적인 여성차별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를 본받아 인내하고 순종하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여성으로 하여금 순종을 강요하고 동정과 순결한 삶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고,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완전하고 저 높은 곳에 있는 거룩한 분으로서 보통의 여성들이 매일 겪는 구체적인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이상 속의 여성일 뿐이며 고통 중에 살다간 마리아의 삶을 보기 어렵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동정녀로서 마리아는 단순히 동정을 지켰다는 데서 여성에게 모범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책임 있게 받아들였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다만 수동적인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결정해갔던 ‘용기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단순히 순종적인 모성으로 여성에게 모범이 되는 게 아니라, 고달픈 삶 안에서 지혜롭고 강한 어머니로 처신함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마리아는 혼외잉태로 인한 손가락질에서부터, 아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진 고통을 겪은 가련한 여인이지만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던 ‘강한 어머니’였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에 대한 인식은 여성차별을 반성하게 하고, 오늘의 여성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여성은 단순히 뒷전에서 섬기고 억제하며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갈 수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동등하며 서로 협력해야 하고 함께 부르심을 실현해나가야 하는 동반자입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여성들의 법적, 정치적 해방은 환영하면서도, 교회 내에서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실현하는데는 아직은 미흡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여자가 처음으로 교사로 임명되었던 때나, 처음으로 의사로, 법관으로 임용되었던 때처럼 그렇게 세상은 변화할 것입니다.
동정 잉태의 초점은 결코 성모 마리아가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마리아론이 아니라, 예수님이 특별한 구세주이심을 강조하는 그리스도론입니다. 이 이야기는 동정녀가 메시아를 잉태하고 출산하리라는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보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14). 임마누엘 메시아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었다는 것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확고한 신앙이었습니다. 동정 잉태를 역사적 사실로 분명하게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볼 때 고등 생명체의 동정 잉태와 출산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과학적 기반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수단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동정 잉태와 출산은 세계가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신앙 안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시고자만 하시면 인간의 성행위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한 처녀의 자궁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로운 방법으로 하느님은 세상에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성서저자들은 동정 잉태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동정성을 통하여 성서저자가 진술하고자 한 것은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동정녀에게서 육신을 취하였다는 사실은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신앙자산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진리는 모든 경우가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답은 ‘교회의 교리확신’인 것입니다. |
출처 :천주교 수원교구 연성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 정인용[스테파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