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성지순례 5 (우라카미성당/浦上天主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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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금희그라시아 작성일17-11-28 22:55 조회12,964회본문
우라카미 성당 (浦上天主堂)
나가사키시(長崎市)에 위치하고 있는
우라카미성당은
메이지 유신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신자들이
건립한 성당으로 1914년 완공당시에는 동양에서 가장 규모가 컸지만
1945년 8월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외벽만 남긴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성당은 1959년에 재건되었습니다.
1959년 나가사키 교구는
도쿄(1891년)에 이어 대교구로 승격되었으며
1962년 야마구치 대주교는
우라카미성당을 주교좌성당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
1945년 8월9일 11시2분
우라카미 상공 500m에서 작렬하여 일대를 초토화 시켰습니다.
우라카미 천주당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성당안에 있던 두신부와 신자 수십명이 즉사
우라카미 신자 12,000명중 약 8,500명이 사망 하였다고 합니다
8월15일 전쟁이 끝나 10월부터 미사를 거행하였고
11월 23일에는 합동위령제를 지냈습니다.
피폭 마리아 소성당
우라카미 성당이 피폭되어 잿더미가 된
당시의 상황을 사진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피폭 성모상
1914년 우라카미 성당 헌당식에 맞춰서 슾인대사가 기증한것으로
원래는 2m정도의 상이었지만
불에 타버린 머리부분만 잔해 속에서 발견 되었습니다.
원폭으로 인하여 희생 된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원폭투하로 인하여 우라카미 신자 12,000명중
약 8,500명이 사망
성당 벽에는 원폭으로 인하여 사망한 신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우라카미 성당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평화공원에서-
나가이 타카시(永井 隆) 박사의 사랑과 죽음
나가이 다카시박사는
나가사키의학 대학교를 졸업한후 세례를 받았고
신자인 모리야마 미도리와 결혼했으며
대학교에서 연구중에 피폭 되었지만
피투성이가 된채 부상자를 구조하고
3일후에 집에 돌아가니
아내의 작은 뼈에 묵주의 쇠사슬이 얽혀있었다고 합니다.
그뒤 불타 없어진 집터에 판잣집을 세우고
두아이와 생활하였습니다.
그때 유명한 원폭체험기 "나가사키의 종"을 집필하였습니다.
나가이 다카시박사 그린
미도리부인의 승천그림
그뒤 박사는
다른사람에게 부축을 받으며 마쓰야마 방면에서 피폭자를 치료하였으며
1946년 7월에 백혈병으로 병상에 누웠다
우라카미신자들은 박사의 활동에 보답하기 위해 1948년
작은 집을 만들었고 박사는 예수님의 말씀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己の如く人を愛せよ)"
에서 이름을 따서
"如己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곳에서 '로사리오의 쇠사슬 '등 많은 명작을 남겼다.
여기당(如己堂)
의학박사 '나가이 타카시'박사가
선종하기 전까지 주거를 하며 많은 집필을 했던 자택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己の如く人を愛せよ)"
에서 이름을 따서
"如己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가이 타카시 기념관
나가이타카시 박사의 생애 관람
저녁식사
나가사키 성지순례에서 맞이하는 이틀째 저녁식사는
스키야끼로-
다음 시마바라성당 (島原教会)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