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한인성당이 "더 순교적인 본당"이 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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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임신부 작성일14-07-01 14:39 조회19,134회본문
[방주의 창] 더 순교적인 교회가 되기 위한 계기 / 허영엽 신부
발행일 : 2014-06-29 [제2901호, 22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세부 일정이 지난 11일 로마에서 확정 발표되었다. 8월 14일 입국해 4박5일간 한국을 방문하는 교황은 아시아청년대회와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식 등 네 차례 미사를 집전한다. 계속 논의돼 왔던 시복식의 장소로 서울 광화문이 확정됐다. 광화문은 우리나라 대표 랜드마크로 조선왕조가 시작된 지 600여 년 동안 우리 역사의 영광과 오욕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이다.
광화문은 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사회에서 많은 신앙선조들이 순교를 당했다. 특별히 광화문은 순교로 희생된 신자들의 피와 땀, 눈물이 배어있는 역사적 장소이자 순교자들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는 조선시대 형조가 있었던 곳이다. 한국천주교회 순교성인 103위 중 7분이 이곳에서 문초를 겪었으며,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서도 역시 7분이 옥고를 치루셨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녜스 등이다.
청계광장의 시작점에 위치한 일민미술관 혹은 동아일보 옛 사옥 터에 우 포도청이 위치해 있었다. 종로 3가의 단성사에 위치해 있었던 좌포청과 함께 이곳들에서도 순교성인 103위 중 22분이 순교를 하셨다.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에는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 다섯 분이 역시 순교를 하셨다. 모두가 옥사하셨거나, 교수형으로 죽고, 또는 죽을 때까지 매를 때리는 장살이라는 형식으로 순교에 이르셨다.
지하철 종각역 1번 출구 제일은행 본점 터는 조선시대 의금부가 위치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16분이, 하느님의 종 124위 중에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해서 엥배르 주교님, 모방신부님, 샤스땅 신부님 등 9분이 국문효수형을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하셨다. 정약종과 그 아들 정하상 등은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셨다. 영풍문고 자리에는 당시 전옥서가 있었다. 이호영 성인 등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으셨다가 옥에서 순교하셨다.
광화문거리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성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 이르는 길은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이었다.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함께 거행되는 광화문에서의 시복미사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시복시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안명옥 주교는 시복시성(諡福諡聖)을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이미 부활하신 순교성인들과 시복 대상이신 하느님의 종 124위는 금세기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진정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남존여비, 신분의 귀천이 존재하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인이 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번에 시복되는 124위 중 황일광(시몬)은 천민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몹시 어렵게 보냈다. 그러나 1792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의 모든 삶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황일광은 입교 후 신자들에게 상상도 못한 대접을 받았다. 신자들은 그가 비천한 백정임을 알았지만 똑같이 대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교우들에게 감동한 황일광은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천주교는 1784년 한국에 전래된 이후 민족과 인류의 구원에 대한 사명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교회가 3000년기를 바라보며, 교황이 주례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갖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시복식을 통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새롭게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그 옛날 순교자들이 용감하게 보여준 무한한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광화문에서의 시복식을 교회가 더 순교적인 교회가 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순교는 곧 증거를 의미한다. 교회가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광화문이 가톨릭 신자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국민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평화와 화해 그리고 소통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광화문은 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사회에서 많은 신앙선조들이 순교를 당했다. 특별히 광화문은 순교로 희생된 신자들의 피와 땀, 눈물이 배어있는 역사적 장소이자 순교자들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는 조선시대 형조가 있었던 곳이다. 한국천주교회 순교성인 103위 중 7분이 이곳에서 문초를 겪었으며,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서도 역시 7분이 옥고를 치루셨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녜스 등이다.
청계광장의 시작점에 위치한 일민미술관 혹은 동아일보 옛 사옥 터에 우 포도청이 위치해 있었다. 종로 3가의 단성사에 위치해 있었던 좌포청과 함께 이곳들에서도 순교성인 103위 중 22분이 순교를 하셨다.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에는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 다섯 분이 역시 순교를 하셨다. 모두가 옥사하셨거나, 교수형으로 죽고, 또는 죽을 때까지 매를 때리는 장살이라는 형식으로 순교에 이르셨다.
지하철 종각역 1번 출구 제일은행 본점 터는 조선시대 의금부가 위치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16분이, 하느님의 종 124위 중에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해서 엥배르 주교님, 모방신부님, 샤스땅 신부님 등 9분이 국문효수형을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하셨다. 정약종과 그 아들 정하상 등은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셨다. 영풍문고 자리에는 당시 전옥서가 있었다. 이호영 성인 등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으셨다가 옥에서 순교하셨다.
광화문거리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성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 이르는 길은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이었다.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함께 거행되는 광화문에서의 시복미사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시복시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안명옥 주교는 시복시성(諡福諡聖)을 한마디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이미 부활하신 순교성인들과 시복 대상이신 하느님의 종 124위는 금세기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진정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남존여비, 신분의 귀천이 존재하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인이 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번에 시복되는 124위 중 황일광(시몬)은 천민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몹시 어렵게 보냈다. 그러나 1792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그의 모든 삶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황일광은 입교 후 신자들에게 상상도 못한 대접을 받았다. 신자들은 그가 비천한 백정임을 알았지만 똑같이 대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교우들에게 감동한 황일광은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천주교는 1784년 한국에 전래된 이후 민족과 인류의 구원에 대한 사명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교회가 3000년기를 바라보며, 교황이 주례하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갖게 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번 시복식을 통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새롭게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그 옛날 순교자들이 용감하게 보여준 무한한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광화문에서의 시복식을 교회가 더 순교적인 교회가 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순교는 곧 증거를 의미한다. 교회가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광화문이 가톨릭 신자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국민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평화와 화해 그리고 소통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허영엽 신부 (서울대교구 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