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께 알립니다(신주쿠 공소 설립에 관한 의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주임신부 작성일14-01-07 11:46 조회18,990회본문
교우 여러분께 알립니다!
신주쿠 공소 건립에 관해 본당 홈페이지에 올려 주신 의견(異見)입니다.
제가 받은 靈感에 의하여 "신주쿠 공소 설립 계획을 취소" 하였으나,
저에게 올려 주신 의견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래 의견에 대한 저의 견해는 "2주일" 정도 후에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아래의 의견을 많은 교우들께서 잘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래
●●●입니다.
시부야구 소속이며, 동경한인교회는 롯폰기 시절부터 다니고 있으니 꽤 오래되었습니다.
공소 설립과 관련하여 자료를 조금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사목회장님도 영세받으신 지 10년이 안 되셨으며, 대부분의
사목 위원이나 신자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분이 공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신부님의 물음에 답하기가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함께 이해해 보고자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저의 교적을 보면 신당동 본당, 광나루 공소에서
세례를 받은 걸로 나옵니다.
제가 태어나던 시절, 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그때, 서울에
가톨릭 교회는 손에 꼽을 정도로 사제도 신자도 적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몇 안 되는 본당(중림, 명동, 혜화, 신당 등)까지 가기 힘든 곳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공동체인 공소가
여기저기에 생겼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천호동은 저의 가족처럼 1.4
후퇴 때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의 임시 정착지였고, 본당이 없었기에 가장 가까운 광나루
공소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에 이때 생긴 공소들은 교세 확장과 더불어 본당 설립이라는
변모를 가져옵니다.[1] 저의 공소에 대한 기억은 물론 없습니다.
그러나 다섯 살 무렵, 저희 본당을 지을 때 어머니를 따라 벽돌 나른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어린 시절 하나로 뭉뚱그려진 성당에 대한 저의 기억 한쪽에 있는 것은 공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제게 공소는 낯설지 않을 뿐 아니라 한국의 순교자 영성을 키워낸 산실이라는
뜨거운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한국이나 일본[2] 모두 제가 조사한 바로는 공소란[3] 사제 수가 적어 파견할 수 없는 곳이나, 신자 수가 적고, 본당에서 멀리 떨어져 다니기 어려운 곳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외져서 좀처럼 본당에 가기 힘든 벽촌에 사는 신자들이 신앙을 유지하고, 견고하게 하려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왔는데 교회는 일찍부터 평신도 중에서 사제를 대리할 수 있는 지도자급
회장[4]을
뽑아 교육하고, 그들에게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5] 공소라는 형태를 유지해 왔습니다.
다행히 저의 지인 두 사람[6]이
현재 공소 회장으로 있어 전화로 일본의 공소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래 주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많은 공소는 신자 수의 증가와 더불어
발전하며, 성전건립과 함께 폐지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대부분 열심한 신자의 집이 모임의 장소가 됩니다. 적었던 신자들이 늘어나고, 신심 깊은 그 지방 유지의 기부와 신자들의
봉사활동 등을 통한 기금, 교구, 본당의 도움 등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되면서 공소는 폐쇄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공소는
성전 건립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를
모시고 싶은 간절한 마음(결국은 하느님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
성전건립을 앞당겼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공소의 대부분이 신자들의 간절한 바램으로 자연스럽게 성전건립으로 이어졌는데, 신부님께서 신주쿠 공소를
만드시려는 목적도 그 끝은 같은지요? 여쭙고 싶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론 성전이라는 교회건물로 드러나지만, 그 이면엔 구원받은 영혼들의 내면의 성전이 성령으로 불타오르고
있지요. 성전은 곧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을 통하여 구현된 전능하신 하느님의 표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인교회는 지난 2009년 7,000만 엔이란 거금의 수리 비용을 들여 지금의 카테도랄 교회를 함께 쓸 수 있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롯폰기 때보다, 2009년 이전보다 눈치 덜 보고 좀 더 당당해졌습니다만, 여전히 미사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고, 교통 면에서도 불편하며, 함께 쓰는 공동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리 후 20년은 보장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후의 일은 들어앉아 있는 사람들 내보낼 수 없을 거라는 말로 반영구적이란 자체해석을
해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제가 들은 내용입니다. 후에
신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관하고 있는 동경한인성당 교회사를 홈페이지에 올리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해되지 않는 일 중의 하나가 여전히 <성전건립기금>이란
명목하에 많은 신자가 기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영구적인데 왜 성전기금을 내는 걸까요? 그것도 <수리비용>이나 <유지비>가 아닌 <성전건립기금>으로 말입니다. 은빛회, 마리아회, 성모회 어머니들이, 또 각종 단체가 봉사활동을 통해 성전건립기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기금 속에는 귀국하는 분들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매님들이 생활비를 절약해서, 신부님이 귀국하시면서 내신 돈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랑의 이야기들이 모여 7천이 됐었고, 그 후에 모인 돈이 지금의 성전기금입니다.
우리는
왜 여전히 <성전기금>을 내는 것일까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 한인성당을 계속 쓸 수 있다고 해도 또 그만큼의 수리비가 들어갈 것입니다. 건물은 노후화되고, 교구나 세키구치 교회의 교세 약화는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은 한인교회에 기대를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함께 씀으로써 얻는 좋은 점도 많이 있습니다만, 동경에 하나밖에 없는 한인교회의 입지조건으로서는 즉 선교 측면이나 자유로운 사용 면에서 사실 불편하지요. 그렇다면 이십 년 후에는 우리 성당을 세우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론
신주쿠 공소를 그 기초로 생각함도 좋다고 봅니다.
물론 신주쿠라는 도심에 공소를 설립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 우리 본당으로서는 설립에 필요한 착수금과 매달 물게 될 유지비가 만만치 않을 듯하여 신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지금 모여 있는 약간의 기금은 이름 그대로 동경한인교회 전부를 위한 곳에 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신주쿠 공소가 한국의 교회사에서 보듯 자연스럽게 성전건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바랍니다), 지금은
공소 건립에 돈을 투자하기보다 계속해서 모아가면서, 신앙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자들의 집이나 가게를 빌려 개인의 영혼 구원과 신앙공동체를 유지해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신자가 늘어나고 큰 장소가 필요하게 될 때 공소 설립이든 무엇이든, 아니 아예 그곳에 한인성당설립을 추진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신주쿠, 오쿠보 주변에서
일하시는 자매님들은 다른 어떤 지역 신자들보다도 열심이셔서 제가 감동을 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부족한
잠을 떨치고, 성당에 나오시는가 하면, 각종 봉사활동에도
철인과 같은 의지로 임하십니다. 때로는 떡을 팔아, 때로는
밥을 지으셔서 성전모금에 보태신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성전건립을 위해 모인 돈으로 자신들을 위한
공소를 마련한다면 기뻐하실까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돈 드는 장소 마련은 뒤로 미루고, 신자들의
집이나 가게를 빌려 공소예절(말씀의 전례 중심)을 실시해
나가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다면, 저도 나서서 말씀봉사에
임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한인성당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씀을 나누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신앙공동체를 유지하고 나아가 성전건립을 위한 일에 힘쓰겠습니다.
성체 봉사자와 수녀님 등 몇 사람이 팀을 이루어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신부님의 허락과 신자들의 동의가 있어야겠지요.
이상이 한국교회사를 통해 공소를 살펴 보면서 느낀 신주쿠 공소에
대한 제 생각과 의견입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면, 한국의
많은 공소가 성전건립으로 이어지면서 폐지되었다는 점, 그리고 처음부터 건물을 짓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집을 빌려 시작하였으며, 하느님을 모시려는 신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자연스럽게 성전건설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차피 신주쿠에 공소를 만드신다면, 결과적으로
자연 발생할 성전건립 문제를 먼 장래를 내다볼 때, 교통 면에서 더 편리하고, 신자들이 많이 사는 신주쿠를 기반으로 추진해 볼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소 설립보다 먼저 평신도를 활용한 진정한 의미의 공소활동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소를 설립하면 성전기금이 쪼개지니까 저는 지금 있는 성전기금을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선교를 주장합니다. 몇 년 실시해 보고 정말 공소가 필요하다면 그때 공소 설립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모인 <성전건립기금>은 한인성당을 위해 정말 소중한 곳에 쓰일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돈 쓰지 않는 공소 선교에 평신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부족한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떨리는
마음으로 감히 썼습니다.
정보 유출 가능성이 있어 이름은 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小教区に属し、常設の聖堂を持っていて、定期的に司祭が巡回してくる教会を指します。 |
본당에 소속되어, 상설 성당을 지니며, 정기적으로 사제가 순회하는 교회를 말함
[3] 「공소(公所)는 본당(本堂)보다 작은 신앙 공동체 단위를 의미하지만, 때때로 신자들의 모임
장소인 강당(講堂)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공소에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에 미사가 집전되지 않았으므로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공소예절이 행해지며,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을 통하여서만 성사(聖事)가 집행되었다. 한국교회에서는 신부가 1년에 두 차례 춘추(春秋)로 공소를 방문하였기 때문에 이때 이루어지는 신자모임을 흔히 “춘추 공소”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이 방문에 주로 집행되는 성사가 고해성사였는데 옛말로 판공성사(判功聖事)라 불렀다. 따라서
신부가 봄에 방문하는 것을 “봄 판공”, 가을에 방문하는
것을 “가을 판공”이라 불렀다. 그리고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기 전에 공소 방문 일정과 신자들이 유의할 점을 기록한 배정기(排定記)를 미리 공소에 보내는 것이 관례였고, 이에 대해 공소 회장은 신부의 방문을 전후하여 공소의 상황을 적어 신부에게 보고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상황” 『한국 근대사와 천주교회』 장동하, 2006, pp20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