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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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임신부 작성일14-01-17 00:03 조회20,566회본문
< 그냥 한 번 말해 봤소 22 > moowee(山을 私有化 해서야?) 마.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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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은 참으로 神聖한 곳입니다.
山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기운이 아주 잔뜩 서려 있습니다.
아니,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산을 신성시해 온 모양입니다.
사람이 생긴 것에 따라 성격이 다르듯이
산도 산세에 따라 산의 정기가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산은 아주 좋아하는데 주님께서 산에 갈 기회를 잘 허락하시지 않아서
이렇게 아예 산 속에서 살게 해 주신 것 아닌가 합니다.
저는 산에 가서 "치고 빠지는 식"의 등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산에 가는 이유는 산 속에 있는 하느님의 피조물과 함께 놀려고 갑니다.
산 속에 있는 걔네들을 보면 너무 기쁘고 반갑고 마음마저 너무 깨끗해 집니다.
아마 걔네들은 태초, 한 처음의 원상태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하느님이 지네들을 창조해 주실 때의 그 기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과는 너무 대조적이죠.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주신 특별 보너스, "자유의지"로
하느님이 주신 그 거룩한 기운을 이렇게 저렇게 몽땅 다 소진시켜 버렸죠.
그래서 하느님이 주신 기운을 잃어버린 靈肉은 그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기운을 가득 품고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山은 몸과 영혼의 잃어버린 기운을 다시 自然스레 되찾아 줍니다.
잃어버린 몸의 면역력과 자연 치유력을 되 살려 줍니다.
잃어버린 영혼의 거룩함을 자연스레 되찿아 줍니다.
제가 이 산 속으로 들어와 뭐 누구들처럼 道를 열심히 닦은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평소에 너무 기도도 안 하는 저였기에 그냥 기도 쪼끔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뭔 기도, 뭔 기도 하루쟁일 기도붙들고 부르스 춘 것이 아니라,
"화살기도"와 "성가"를 하루쟁일 열심히(목소리가 안 나와 맘으로) 불러 댔을 뿐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저의 靈肉이 이처럼 변화했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저의 영육의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이 바로
"하나하나",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엄청"입니다.
제가 늘상 말씀드리는 대로, 몸이 망가지는 것(병)이 뜻하지 않은 사고외에
모든 병이 오랜기간에 걸쳐 잘못 살아온 결과로 생겨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시간 내에 병을 고치려 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결과로 자연스레 병이 찾아 왔다면,
그 병에 대한 고침도 자연스럽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영혼이 더렵혀졌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영혼을 정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로 영과육을 치료하고 정화시키려 한다면,
영육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 치료기간과 정화기간을 당신이 알아서 조절해 주십니다.
다른 말로 치료와 정화기간을 엄청 단축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영육이 고장난 사람은 산으로 들어와야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산은 하느님의 거룩한 기운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2년 전, 전남 영암의 월출산에 등산을 갔는데
그 산을 하루 다녀와서 일주일 내내 제 얼굴에 광채가 사라지지 않았고
제 맘과 영혼도 아주 맑고 깨끗함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다시 한 번 월출산에 가보고 싶은데 시간을 안 주시네요.
다음에 원하시는 분이 계시면 저와 함께 하시죠.
저는 과거 군종신부 시절에 강원도에서 4년을 살아본 경험이 있는데
강원도의 산은 매우 남성적인 기운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남쪽의 이 지리산은 보좌신부 시절에 지리산 종주, 2박3일을 하다가
하도 고생을 해서 앞으론 지리산에 절대 안 간다고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그 속으로 들어와 살게 될 줄이야?
무슨 말이든 기분 내키는 대로 내뱉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이 지리산은 우리나라의 어머니 산이라서 그런지 아주 온화하기 그지없습니다.
병자들에게는 참으로 안성맞춤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지리산 깊은 곳곳에는 많은 병자분들이 큰 병을 치유받고
조용히 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山은 이처럼, 저마다의 기운을 뿜고 있습니다.
아주 흰 백색의 만년설과 파란하늘의 히말라야의 산을 TV에서 그냥 지켜만 보아도
우리의 마음이 신성해 지는 것은 왜일까요?
그리고, 왜 그 나라의 사람들이 너무도 종교적일까요?
성경에서 하느님은 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부르셨을까요?
엘리야가 왜 갈멜산에서 살았을까요?
그리스의 아토스 산에 왜 그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을까요?
山, 山, 山!
山은 인간의 때가 적은 거룩함이 담겨 있는 곳입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담겨 있는 "山"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한 산을 교회법에 의한 "屬地主義"를 적용하여
신자들의 거룩한 신심행위를 제한해 버린다면 그것은 산의 "私有化"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교구의 경계는 과연 어디까지 입니까?
지리산은 광주대교구와 마산교구의 관할지역인데
지리산을 등산한다면 등산코스에 의해 국가 행정구역상 전라도와 경상도 땅을
이리저리 밟고 지나가게 됩니다.
다른 말로 광주대교구의 땅과 마산교구의 땅을 번갈아 말입니다.
그리고 이 넓은 지리산 깊은 산 속 곳곳에까지 교구에서 다 관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산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바다와 하늘에까지 "속지법"이 적용되는지 저는 무척 궁굼합니다.
아픈 신부가 영육을 고치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산에 들어와 살다가
영육을 고쳐서 그 경험을 다른 영혼들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속지법이 필요한 것인지요?
제가 체험한 하느님을 다른 영혼들에게 알려서 그 체험을 전해 받은 영혼은
또 다른 영혼에게 하느님을 전해 주는데 그것이 그리도 크게 문제가 되는지요?
제가 약 5년을 지리산에서 살아왔지만 산 속은
그 지역 본당신부의 활동에 한계가 있음을 눈여겨 보아 왔습니다.
산 속은 속지법을 적용시킬 수 없는 지역임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본당신부의 발걸음이 지리산의 어느 곳까지 미칠 수 있겠습니까.
지도를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보시면 내 지역이 눈에 잘 들어 와도
산 속으로 들어오시게 되면 숲만 보입니다.
하늘도 잘 안 보입니다.
제가 서울교구 소속의 사제이지만 저를 찾는 아픈 이들의 발걸음을
그냥 돌리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픈 영혼들은 예수님의 길 잃은 어린양입니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드리고자 사제가 된 사람이
그 먼데서까지 저를 찾아오시는 어린양들을 제가 외면해 버린다면,
그 어린양을 위해 "희생양"이 되신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눈물을 닦아드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눈물은 아픈 이들의 눈물과 똑같은 눈물입니다.
하느님이 지금 눈물을 흘리십니다.
ㅠㅠ(성부) ㅠㅠ(성자) ㅠㅠ(성령) 어엉 어엉 엉엉엉~~~
어?? 텍스티 콘이 왜 없찌? |